‘둠(Doom)’이라는 게임이 있다. 천재 프로그래머로 시대를 풍미했던 존 로메로와 존 카멕이 설립한 이드소프트웨어가 1993년 첫선을 보인 작품이다. ‘배틀그라운드’ 같은 1인칭 총쏘기(FPS: first person shooting) 장르의 시조로 불린다. 지옥에서 넘어온 악마들을 물리친다는 단순한 내용이지만, 당시로선 새로운 게임 방식과 호쾌한 액션 덕분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1편을 시작으로 지난 3월 최신작 ‘둠 이터널’에 이르기까지 28년간 꾸준한 장수 시리즈다.
둠이 유명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비공식적으로 둠은 가장 많은 종류의 기기에서 작동된 게임이란 타이틀을 얻었다. 1993년 발매 당시 MS-DOS 운영체제(OS) 전용으로 만들어졌다. 이드소프트웨어는 1997년 이 게임의 소스코드를 비상업적 용도라면 누구라도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공개했다. 처음에는 개발자들이 게임 내용을 보완하거나 윈도, 리눅스 등 다른 OS에서 실행할 수 있도록 소스코드를 바꿔 배포하곤 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게임 자체보다는 온갖 종류의 기기에서 둠을 실행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개발자들은 디지털 카메라 화면은 물론 공학용 계산기, 스마트 워치, 심지어 은행 ATM(현금입출금기)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기기에서 악마를 때려잡았다. “여기서 둠이 돌아간다(It runs Doom)”는 유행어가 나왔을 정도다.
세상 쓸모없는 일이라고? 이런 시도가 엄청난 결과를 낳기도 한다. 현재 사용되는 모든 OS의 ‘원형’은 유닉스(UNIX)다. 유닉스가 만들어진 계기도 게임이다. 1969년 미국 벨 연구소의 과학자 켄 톰슨은 ‘스페이스 트래블’이라는 게임을 개발했다. 우주선을 조종해 다양한 행성을 돌아다니는 단순한 내용이다. 당시 벨 연구소에서 사용하던 대형 컴퓨터(메인프레임) GE-635에서 작동됐다. 하지만 GE-635에서 게임을 하려면 조작이 불편한 데다 컴퓨터를 구동하기 위한 비용도 많이 들었다. 동료인 데니스 리치는 연구소 창고에 있던 소형 기기 PDP-7을 발견하고는 톰슨과 함께 스페이스 트래블의 이식 작업을 시작했다. 이들은 이 과정에서 어느 기기에서든 소프트웨어를 구동할 수 있는 범용 OS 유닉스를 만들게 됐다. 이후 유닉스를 여러 기기에서 사용하기 위해 새로운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를 고안했다. 바로 오늘날 존재하는 대다수 프로그래밍 언어의 ‘원조’인 C언어다. 두 사람은 유닉스 개발 공로를 인정받아 1983년 정보기술(IT) 분야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튜링상을 받았다.
ATM 기기에서 둠을 실행한 개발자들이나 게임을 이식하다 유닉스를 만든 벨 연구소 과학자들의 행동은 ‘해커 정신’으로 요약할 수 있다. 페이스북 창업자인 마크 저커버그 최고경영자(CEO)는 상장 당시 주주 서한에서 “해커라는 단어는 컴퓨터에 침입한 사람이란 부정적인 뜻으로 통용되지만 현실에서 해킹은 무언가를 빨리 만들거나 한계를 시험하는 것을 의미한다”며 “내가 만난 대다수 해커들은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려는 이상주의적 경향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해커들은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먼저 실행해보고 개선점을 찾는 과정을 반복한다. “코딩이 논쟁보다 낫다”는 게 이들의 철칙이다. 페이스북은 기업 문화로 ‘해커 정신(hacker way)’을 내세우고 있다.
해커 정신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관통하는 새로운 원칙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류는 이전까지 겪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기존의 경험과 지식이 무의미한 상황에서 철저한 계획은 도리어 독이 될 수 있다. 한국이 코로나19를 겪으며 전 세계적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선별진료 과정에 ‘드라이브 스루’, ‘워크 스루’ 등 아무도 해보지 않은 방식을 가장 빠르게 도입하고 보완해나갔기 때문이다.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 한 게임기 광고 문구다. 해도 되는지 먼저 허락을 받기보다는 저지르고 난 뒤에 용서를 받는 편이 쉽다는 얘기다.
이 광고가 타깃으로 삼은 건 게임기를 갖고 싶은 유부남이었지만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정부, 기업, 개인 모두에게 통용되는 얘기다. 과거 어느 때보다 상상력과 실행 정신이 필요한 시점이다.<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margin:25px 0; border:1px solid #c3c3c3" />해커톤이 밤샘 토론? 결과 도출이 핵심
해커톤(hackathon)이란 단어가 유행이다. 해커(hacker)와 마라톤(marathon)을 합친 단어로 개발자와 기획자 등이 한데 모여 정해진 시간 동안 서비스나 프로그램의 프로토타입을 만드는 걸 뜻한다.
1999년 캐나다 캘거리에서 오픈BSD(유닉스 기반 운영체제) 개발자들이 모인 행사에서 이 이름을 처음 사용했다. 이후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활성화됐다. 페이스북은 내부적으로 1~2개월에 한 번씩 해커톤을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는 “페이스북의 성공한 서비스와 상품 가운데 많은 것이 해커톤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밝혔다.
해커톤의 핵심은 행사가 끝날 때까지 무언가 결과물을 이뤄낸다는 점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해커톤이란 단어의 의미가 다소 바뀐 느낌이다. 결과물을 내기보다는 끝장토론, 밤샘토론을 대신하는 단어로 더 자주 쓰인다. 기업은 물론 공공기관, 정치권에서도 해커톤을 통해 해커와 같은 창의성을 찾겠다고 아우성이다. 한 번쯤은 해커들의 창의성이 어디서 출발했는지 고민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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