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한국은 통일신라, 후삼국, 고려를 거치며 외국과 교역이 활발한 나라였다. 하지만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조선은 폐쇄적인 대외정책을 펼쳤다. 국가에서 지정한 지역 외에서의 교역을 금하였고, 민간보다는 관(官) 중심의 무역이 이루어졌다. 조선 사회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 사회에서 상업을 가장 천시하였고, 영국에서 시작된 서양의 산업혁명과 개혁·개방의 시대에도 조선은 세도정치와 국내 정치의 혼란으로 우물 안 개구리였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조선 말기인 1871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물리치며 자신감을 가진 흥선대원군이 척화비에 새긴 글귀다. 당시는 프랑스 미국 등이 조선과의 통상 요구를 위해 강화도 등에서 무력시위를 하던 시기였다. 흥선대원군은 집권 후 세도정치를 청산하고 왕권 강화를 위한 각종 개혁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들이 시대적 변화에 맞는 정책이었는지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서원철폐, 토지제도·통치 법률 정비 등은 왕권 강화가 목적이었다. 반면 서양에서는 산업혁명 이후 신기술이 발전하면서 경제성장이 활발했다. 왕권이라는 절대적 권력보다는 국민의 기본적 권리에 관한 법들이 발달하면서 대외교역이 발달했다. 하지만 조선은 시대적인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고, 서양 열강의 침략에 더욱 폐쇄적인 정책을 펼쳤다. 대내적으로 왕권 강화를 통해 정치를 안정시켰을지라도, 대외적으로 강화된 쇄국정책은 해외의 발전된 문물을 들여올 수 없어 주변국인 청나라, 일본보다 발전이 더디게 된 원인이 되었다.
갈라파고스 경제의 조선
조선의 쇄국정책은 세계적인 흐름에 동떨어진 외딴 섬과 같은 처지였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갈라파고스 경제’라고도 한다.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경제를 나타낼 때 쓴다. ‘갈라파고스’라는 단어는 고립적인 의미를 덧붙일 때 사용한다. 갈라파고스라는 섬은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독자적으로 진화한 종들이 고유한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육지와 교류가 시작돼 외부 종이 유입되자 면역력이 약한 고유종들이 대거 멸종되거나 멸종 위기를 맞았다. 조선 또한 비슷한 상황이었다. 조선의 쇄국정책은 새로운 문물에 대한 습득을 어렵게 했다. 결국, 강대국들의 발전된 무기 앞에 무너지게 되어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을 통해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고,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프랑스·영국·일본·러시아 등의 대규모 산업자본에 자국 시장을 내주게 되었다. 조선은 상공업 활동에 대한 엄격한 규제로 대규모 상업 자본가의 출현이 어려워 경쟁력이 약화되었다. 이는 장기적인 성장을 위한 대규모 자본 축적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규제공화국’ 대한민국
관(官) 중심의 경제정책은 결국 규제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은 왜구의 침입과 임진왜란 등을 겪으며 일본에 대해 지정된 교역관을 통해서 무역을 허용했고, 그에 대한 인원까지 지정하였다. 민간의 경제활동에 대한 규제와 상업을 천시하는 문화로 조선은 발달된 기술과 학문을 받아들이는 시기를 놓쳤다. 규제는 경제활동을 위축시키게 하는 성질이 있다. 지금의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세계경제포럼(WEF)에서 ‘정부 규제 부담’ 항목에서 141개국 중 87위로 경제 규모에 비해 낮은 순위를 받았다. 법률을 바탕으로 행정을 집행하는 공무원의 특성상 공무원 수의 증가는 규제 증가와 연결될 수 있다. 과도한 규제 증가는 기업의 투자·생산 활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타다와 같은 공유서비스나 원격의료 등 한국에서만 허용되지 않는 ‘갈라파고스 규제’로 산업 패러다임 전환의 시기에 세계와 동떨어져서는 안 된다.
정영동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원 jyd54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