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사상 처음으로 발권력을 동원해 민간기업이 발행한 회사채와 기업어음(CP) 매입에 나선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 따른 기업의 자금난이 심각해 한은이 초유의 조치를 취했다는 평가다.
정부는 20일 제4차 비상경제 중앙대책본부 회의를 열어 회사채·CP 매입기구(SPV) 설립 방안을 확정했다. SPV는 10조원 규모로 우선 설립되며 한은은 여기에 8조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나머지 2조원은 정부와 산업은행이 1조원씩 출자한다.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은 이날 경제 중대본 회의 직후 브리핑에서 “코로나19 위기의 전개에 따라 (SPV 규모를) 20조원으로 확대하는 방안도 수시로 점검할 것”이라고 밝혔다.
SPV는 그간 시장안정대책에서 소외된 저(低)신용 기업을 지원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회사채는 우량 등급인 AA등급부터 투기등급인 BB등급까지 매입하기로 했다. BB등급은 코로나19 사태 전후로 투자등급에서 투기등급으로 떨어진 ‘추락천사(fallen angel)’ 기업으로 한정한다. BBB등급 이하는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시장 예상보다 폭넓은 지원이란 평가가 나온다. CP·단기사채도 비우량 등급인 A2, A3등급까지 지원한다.
한은이 SPV를 통해 영리기업에 직접 대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부는 대신 한은을 ‘선순위 대출자’로 설정해 중앙은행의 신용 위험을 줄이기로 했다. 대출 상환금을 한은부터 받는다는 얘기다. 운용자금의 20%(2조원) 이상 손실이 나지 않는 한 한은의 피해는 없다.
SPV 출범 시기는 3차 추가경정예산안의 국회 통과 직후다. 3차 추경 편성과 국회 심의 기간을 고려하면 다음달 말께 SPV가 가동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이날 40조원 규모의 기간산업안정기금 운용 방안도 확정했다. 항공·해운업에서 총 차입금 5000억원, 근로자 수 300인 이상 기업을 지원 대상으로 정했다. 내달 초부터 지원 신청을 받을 예정이다.<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margin:25px 0; border:1px solid #c3c3c3" />한은, 발권력으로 8兆 투입…'BB등급' 하락한 회사채도 사들인다
정부와 한국은행이 20일 저신용 등급 회사채·기업어음(CP) 매입기구(SPV)를 본격 가동하기로 함에 따라 ‘유동성 보릿고개’를 겪던 A·BBB등급 기업들의 자금조달에 숨통이 트일 전망이다. SPV는 저신용 회사채·CP를 매입하기 위한 재원 10조원을 산업은행(2조원)과 한국은행(8조원)으로부터 마련한다. 한은이 사상 처음으로 발권력을 동원해 회사채 매입에 나서기로 하자 시장도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한화건설 효성 OCI 등 A급 기업 ‘숨통’
SPV는 매입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산은으로부터 1조원 규모의 출자금과 1조원 규모의 후순위 대출을 받기로 했다. 산은은 SPV 지원금을 조달하기 위해 정부로부터 1조원을 출자받는 것은 물론 1조원어치 채권(산업금융채권)을 발행하기로 했다. 한은도 SPV에 8조원 규모의 선순위 대출을 한다.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에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4명 이상의 찬성으로 대출을 할 수 있다’고 명시한 한은법 80조에 근거한 결정이다. 한은이 발권력을 동원해 회사채를 매입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은 대출금에 선순위 지위를 부여한 것은 중앙은행의 손실 최소화 원칙을 준수하기 위해서다. SPV가 인수한 회사채의 부도로 손실을 입을 경우 산은 출자금(1조원), 후순위 대출(1조원), 선순위 대출(8조원) 순서대로 손실을 반영한다.
미국 CP매입기구(CPFF) 등은 정부 출자금이 매입 금액의 10%에 머무른 반면 한국 SPV는 산업은행의 출자 및 후순위 대출 비중을 20%로 하는 구조를 짰다. 정부가 그만큼 한은이 손실을 입지 않도록 배려해 구조를 설계했다는 평가다.
SPV는 매입 대상이 결정될 때마다 산은과 한은에 출자와 대출을 요청하는 ‘캐피털콜(capital call)’ 방식으로 운용된다. 특정기업에 지원금이 몰리지 않도록 기업당 회사채 매입 한도를 2000억~3000억원으로 설정했다. SPV는 회사채 매입 금리를 시장금리에 최대 100bp(1bp=0.01%포인트)를 더해 결정할 예정이다.
매입 대상은 BB~AA등급(CP는 A1~A3등급)이면서 2년 연속 이자보상비율(영업이익을 이자비용으로 나눈 값)이 100%를 웃도는 기업이 발행한 만기 3년 이내 채권이다. SPV는 주로 A등급을 매입할 계획이다.
그동안 정부 지원 사각지대로 남은 신용등급 BBB~A급 기업들의 채권이 이번에 매입 대상에 오른 만큼 ‘유동성 온기’가 자금시장 전반으로 퍼질 것이란 기대가 높다. 한 증권사 채권부서 임원은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던 효성 한라 OCI 한화건설 GS건설 등 BBB~A급 기업의 회사채 발행이 원활하게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기간사업기금 지원 조건도 확정
정부는 이날 40조원 규모의 기간산업안정기금 운영 방안도 확정했다. 항공·해운업 등의 대기업을 지원하는 대책이다. 지원 대상은 총차입금이 5000억원 이상이고 근로자 수가 300명 이상인 항공·해운업종 기업으로 정했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관계부처 협의를 거쳐 자동차, 조선 등 업종까지 지원을 확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기업은 운영비용과 이자비용 등 경영자금을 시중금리보다 소폭 높은 수준의 금리로 빌릴 수 있다. 지원을 받는 기업은 근로자(5월 1일 기준) 90% 이상의 고용을 기금 지원 개시일부터 6개월간 유지해야 한다. 약속을 못 지키면 지원금을 반납해야 한다. 지난해 기준 연봉 2억원 이상인 임직원은 보수를 동결해야 하고, 배당 및 자사주 매입 등에서도 제한을 받는다.
총 지원금액의 최소 10% 이상은 전환사채, 신주인수권부사채 등 출자 방식으로 지원한다. 정부가 일정 부분 기업의 지분을 갖는다는 얘기다. 출자는 지원액의 최대 20%까지 가능하다.
협력업체 지원 장치도 마련했다. 기간산업안정기금 내 1조원을 협력업체 지원분으로 배정했다. 다만 지원 대기업의 협력업체 고용 유지는 의무 사항이 아니라 자율적 노력 사항으로 하기로 했다.
서민준/김익환/성수영/이선아 기자 morand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