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윤미향 의혹'보다 걱정스러운 '집단사고'

입력 2020-05-19 17:58
수정 2020-05-20 00:16
시민단체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의 기부금 유용 논란보다 더 걱정스러운 건 여권의 대응 방식과 태도다. 회계투명성 의혹 제기를 놓고 도지사와 장관을 지낸 중진 의원이 “친일·반(反)인권·반(反)평화 세력의 최후공세”라고 몰아붙인 것을 신호탄 삼아 여당 인사들이 거칠고 거센 엄호사격을 쏟아냈다. 여당 국회의원·당선자 15명은 “역사의 진실을 바로 세우려는 운동을 폄하하려는 친일 세력의 공세”라는 성명서까지 발표했다.

길게 말할 것 없이 논리 비약이고 억지다. 위안부 피해자들을 돕겠다며 모금한 돈이 취지에 맞게 쓰였는지를 묻는 질문에 상응하는 답변을 내놓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이 단체 이사장을 지낸 윤미향 씨는 “공개할 수 없다”고 버티고 있고, 여권 인사들은 그런 윤씨를 ‘의혹 제기=친일행위’라는 주장으로 감싸고 있다. 경기 안성 위안부피해자 쉼터 매매를 둘러싼 논란 등 유용 의혹이 확산되자 당 일각에서 기류 변화 조짐이 나타나고 있기는 하다. 여당 차기 지도자로 유력한 이낙연 전 국무총리는 “사태를 엄중하게 보고 있다”고 했다.

이번 사태가 어떻게 정리되든 ‘친일몰이’ 방식의 여권 대응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제기된 문제를 제쳐놓고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불순하다”며 특정 프레임(틀)을 씌워 몰아붙이는 것은 후진 정치의 전형이다. 하물며 여권 정치인들은 스스로를 ‘권위주의 시절 프레임 정치의 희생자’로 자처하는 터다. 그런 여권의 ‘프레임 정치’에 불을 댕긴 건 문재인 대통령의 작년 3·1절 기념사였다. 문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일제가 독립운동가를 ‘사상범’으로 몰아 탄압하면서 ‘빨갱이’라는 말이 생겨났고, 해방된 뒤에도 일제 경찰 출신이 독립운동가를 ‘빨갱이’로 몰았다”며 “정치 경쟁 세력을 비방하는 도구로 변형된 ‘빨갱이’와 ‘색깔론’은 하루빨리 청산해야 할 친일 잔재”라고 했다.

문 대통령의 이 기념사를 계기로 여권의 ‘친일 잔재 적폐청산’ 공세가 본격화됐다. ‘친일 흔적’을 지우겠다며 도로 이름과 중·고등학교 교가를 바꾸는 열풍이 일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징용공 배상판결을 놓고 한국과 일본 정부 간 외교·통상·안보 갈등이 증폭되면서 ‘친일 세력 척결’ 목소리는 더 드세졌다. 합리적 해법을 모색하자는 의견에 ‘친일’을 넘어 ‘토착왜구’라는 괴상한 조어(造語)까지 지어내며 공격을 퍼부었다.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하지만, 미래까지 발목을 잡아선 안 된다”는 논의를 “그럼 친일을 용인하자는 것이냐”는 다그침으로 깔아뭉갰다. 여권에 정치적 악재가 터질 때마다 이 프레임이 어김없이 활용됐다. 문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받던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의 범법혐의가 속속 드러나던 시기에 등장한 것도 “친일파들의 책동에 굴복해선 안 된다”는 구호였다. ‘친일청산’ 몰이는 여권에 더없는 정치 무기가 됐고, 지난달 치른 총선을 앞두고 절정을 치달았다. 여당 대표가 선거일 직전까지 제1야당을 ‘토착왜구’로 몰아붙일 정도로 끈질기고 집요했다.

총선을 유례없는 압승으로 끝낸 여권은 이제 스스로를 차분하게 돌아볼 때가 됐다. 개헌을 빼고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절대다수 국회 의석을 차지했기에 프레임 정치는 더욱 위험하다. 여권이 ‘친일몰이’를 하는 과정에서 반대 의견을 거칠게 차단하는 집단사고(group thinking)를 키웠다는 게 무엇보다도 걱정스럽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기부금을 제대로 썼는지를 묻는 사람들에게 ‘반인권·반평화세력’이라는 프레임을 씌운 걸 단순한 ‘오버’로 받아넘길 수 없는 이유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참사로 기록된 ‘쿠바 피그만 침공사건’은 집단사고에 의한 판단 왜곡의 단적인 사례로 회자된다. 존 F 케네디 정부 시절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1400명의 ‘특공대’를 피그만에 기습 침투시키려다가 거의 전원이 사살되거나 포로로 잡히는 망신을 당했다. 공산정권을 전복하기는커녕 포로 송환을 위해 5300만달러라는 거액을 카스트로 독재정부의 통치자금으로 내줘야 하는 굴욕까지 겪었다. 당시 작전 수립에 참여한 국무장관, 국방장관, 중앙정보부장 등은 아이비리그 출신의 전형적인 수재들이었다. 성장 배경은 물론 사고방식까지 비슷했던 이들에게 다른 목소리를 기대할 수 없었던 게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다른 의견이 끼어들 여지를 막는 집단사고와 프레임 정치가 위험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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