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임원과 만화가. 좀체 어울리지 않는 두 직업을 모두 경험한 이가 있다. 지난해 11월 유럽 근대사를 다룬 만화 《아름다운 시대, 라 벨르 에뽀끄》를 펴낸 만화가 신일용 씨(62·사진)다.
신씨는 1984년 삼성물산에 입사해 26년 동안 삼성에 몸담은 ‘삼성맨’이다. 2002년 삼성물산에서 삼성SDI로 자리를 옮긴 이후 2009년까지는 상무로 일했다. 삼성을 나와서도 효성그룹의 정보기술(IT) 계열사인 갤럭시아커뮤니케이션즈 대표와 세아창원특수강 전무 등으로 일하다가 2018년부터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지난 13일 경기 성남에 있는 만화 작업실에서 만난 신씨는 “기업인이 만화가로 전업한 것을 두고 남들은 신기하게 쳐다보지만, 기업인으로 일했기 때문에 만화가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회사에서 마케팅 일을 주로 맡으면서 유럽에 출장 갈 일이 자주 있었는데, 자연스레 유럽 역사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기 시작했다”며 “이때 보고 들은 이야기를 언젠가 책으로 엮어내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했다”고 말했다. 퇴직 후 그는 글이 아닌 만화로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글보다는 극적인 느낌으로 스토리텔링에 집중하고 싶다는 이유에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만화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고등학생 시절 그림반 활동이 그림 공부의 전부였다고 한다. 신씨는 “그림은 자전거를 타는 것처럼 몸이 기억해 한 번 배워놓으면 세월이 지나도 금방 다시 손에 익더라”라고 말했다.
그가 만화책으로 엮어낸 이야기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유럽 역사다. 자본주의가 무르익어 부르주아 계급이 성장하고, 예술에 대한 수요도 커지면서 프랑스에선 이 시기를 ‘라 벨르 에뽀끄(에포크)’라 불렀다. 우리말로 ‘아름다운 시대’라는 의미다. 신씨는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아프리카, 아시아에선 피와 죽음이 낭자한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지는 한편 구조적 모순에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나오기도 한 시기가 이때”라며 “오늘날 많은 문제와 열매가 이 시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해 만화 데뷔작으로 (이때를) 택했다”고 밝혔다.
신씨는 ‘기업인으로서 시간이 많지 않았을 텐데 언제 역사를 공부했느냐’는 물음엔 “일생 동안 내 곁엔 언제나 책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리 바빠도 가방에 책 한 권씩은 넣고 다닌다”며 “출장길에 비행기를 기다리거나 시차 적응이 안 돼 잠을 설칠 때 틈틈이 책을 읽었다”고 했다.
신씨의 다음 만화 소재는 동남아시아 역사다. 삼성물산에 재직 중이던 1990년부터 약 4년간 싱가포르 주재원으로 근무했다는 신씨는 “1년 중 절반은 싱가포르에, 절반은 동남아 각 지점을 돌아다니며 보고 배운 역사와 시각이 있다”며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역사적 맥락이 담긴 동남아의 숨겨진 면모를 내년 말까지 선보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의진 기자 justj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