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과 영세사업자를 지원하는데 주력했던 일본 정부도 미국과 유럽 정부를 따라 대기업을 직접 지원하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대기업이 무너지면 중소기업과 영세사업자가 더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고 보고 대기업에 직접 자본을 공급하기로 했다.
◆정책금융 활용해 신종자본증권·우선주 매입
14일 니혼게이자이신문과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신종자본증권(하이브리드채권)과 의결권이 없는 우선주를 매입해 주는 방식으로 대기업과 중견기업을 구제하는 방안을 마련한다. 이달 하순 편성하는 2차 추경예산안과 재정투융자계획에 필요한 자금규모를 반영할 계획이다.
일본정책투자은행과 일본정책금융공고, 산업혁신투자기구(JIC) 등 주요 정책금융기관을 활용해 대기업과 중견기업의 신종자본증권과 우선주를 매입하는 것이 핵심이다. 기업의 신종자본증권을 먼저 사들이고, 재무구조가 급속히 악화한 대기업에 대해서는 우선주도 인수할 계획이다.
부채와 자본의 중간 단계의 자금조달수단인 신종자본증권과 우선주는 회계상 자본으로 인정된다. 이를 통해 자본을 늘리면 신용등급의 하락을 막고, 은행으로부터 추가 대출을 받기도 쉬워진다. 경영에 관여할 수 있는 의결권이 없기 때문에 기업들이 부담없이 지원을 요청할 것으로 일본 정부는 기대하고 있다. 신주를 발행하지 않고도 자본을 증가시킬 수 있기 때문에 지분율이 희석되지 않는다는 점도 기업과 기존주주들이 선호하는 이유다.
다만 일본정책투자은행이 우선주를 사들이면 JIC가 공동으로 보통주를 인수하는 방안도 마련한다. 일본 정부가 정책금융기관을 통해 대기업 지분을 보유하는 구조다. 세금으로 대기업을 구제하는 대신 경영에 관여할 수단을 일정 부분 확보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 항공과 자동차, 철강회사 등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은 기업들이 우선지원 대상에 오를 전망이다.
◆대기업 무너지면 'V자회복' 물건너가
일본 정부가 지난달 7일 사상 최대 규모(117조엔)의 긴급경제대책을 발표했지만 기업 대책은 주로 중소기업과 영세사업자의 자금조달 지원에 맞춰져 있었다. 대기업에 자본을 직접 주입하기로 지원방식을 바꾼 건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 때문이다. 대기업 경영이 위기를 맞으면 대규모 실업이 발생하고 하청업체인 중소기업에도 영향을 미쳐 경제회복이 더뎌질 수 밖에 없다는게 각국 정부의 공통된 판단이다.
이 때문에 미국과 독일은 100조원 이상, 한국도 40조원 규모의 대기업 지원대책을 내놓았지만 일본은 1000억엔 규모의 출자지원이 대기업 대책의 전부였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난달 24일 일본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올 가을 이후에도 코로나19를 수습하지 못하면 일본 정부가 미국의 불량자산구제프로그램(TARP)과 비슷한 기업의 자본확충 수단을 검토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TARP는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미국 정부가 금융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다. 정부가 은행의 우선주를 매입해 자본공급을 늘리는 대신 은행이 우선주를 상환하지 못하면 보통주로 전환해 경영개선을 촉구할 수 있는 제도다.
대기업에 자본을 직접 주입하는 방안을 꺼내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일본 정부가 코로나19의 경제적인 여파가 장기화할 것으로 본다는 의미다.
일본 정부는 이 밖에 민관펀드의 지역경제활성화지원기구(REVIC)를 활용해 지역경제를 지탱하는 중견기업의 자본확충도 지원하기로 했다. 민간 금융회사에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근거 법령인 금융기능강화법의 일몰시한도 연장한다. 원래는 2022년 3월 일몰 예정이었다. 기업을 지원하다가 경영파탄에 빠지는 은행에 공적자금을 투입할 수 있는 근거를 남겨 금융회사들에 기업의 자금조달 지원을 압박하는 조치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