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남북관계, 독일식 원칙을 세워야 한다

입력 2020-05-13 18:06
수정 2020-05-14 00:10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이 집약된 ‘베를린 구상’(2017년 7월)의 핵심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이루고 남북 교류협력을 제도화해 평화체제를 다지는 것이다. 그러나 북핵 문제는 여전히 표류 중이며, 그나마 남북 합의의 일부가 초보적 신뢰구축 단계에 진입한 것이 전부다. 북한이 구태를 벗고 호응하지 않으면 ‘평화 만들기’는 희망고문일 뿐이다.

문 대통령은 판문점 선언 2주년을 맞은 지난달 27일 ‘현실적·실천적인 남북 협력’ 의지를 밝혔다. 독일처럼 우리도 자강 노력과 외부 환경 조성에 힘쓰다 보면 언젠가 통일의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그때는 아마도 북한이 개혁·개방에 성공하거나 체제 유지의 임계점에 도달해 북한 주민이 남한 동포처럼 살고 싶다는 욕구를 분출하는 상황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예상에 따른 준비가 없으면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형용한 ‘신의 옷자락’을 우리는 붙잡지 못할지도 모른다.

서독이 통일에 이르기까지 분단관리에 성공한 비결은 다섯 가지 선명한 원칙에 있었다. 그것은 △서독이 독일을 대표한다는 입장과 국력 우위에 바탕을 둔 정상적 양독 관계 형성 △동독 주민들의 고통 경감 △다양한 교류협력으로 이질화 방지 △상호주의의 냉정한 적용 △정책 추진에 관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과 투명성 유지 등이다. 이런 독일의 선례는 분단 구조가 다른 우리에게도 매우 유용하다.

첫째, 남한은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북한이 설정한 ‘위계(位階)적 남북관계’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통일 후 북한의 존재는 동독처럼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만 남게 될 것이다. 더욱이 남한의 경제적·문화적 힘이 월등하다. 한·미 동맹의 군사적 준비태세도 비교 우위다. 여기에 미국 전술핵을 조건부 재배치하는 ‘핵 공유 체제’를 구축할 수 있다면 북핵 억제와 폐기는 훨씬 더 쉬워진다. 이런 맥락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이중결정’(1979년 12월)이 없었더라면 유럽의 세력 균형과 독일 통일도 없었다”는 통일 독일 첫 총리 헬무트 콜의 회고는 의미심장하다.

둘째, 남한 주도의 통일을 염두에 두고 북한 주민이 겪는 삶의 고통을 분담하는 노력을 전개해야 한다. 그런데 작년 12월 정부는 유엔 총회의 ‘북한 인권 결의안’ 채택과정에서 공동제안국의 최소 책임까지 포기했다. 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한반도 프라이카우프’(독일어로 ‘자유를 산다’는 뜻) 정책을 스스로 부정한 셈이다.

셋째, 실천하기 쉬운 교류부터 진전시켜 동질성을 회복하되, 북한 비핵화 협상의 유일한 지렛대인 대북제재의 틀은 유지해야 한다. 우선적으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보건 협력, 이산가족 상봉, 개별 관광, 동해북부선 철도 연결, DMZ 생태공원 조성, 남북 도시 자매결연 사업 등의 추진이 바람직하다.

넷째, 서독의 비(非)군사 협력 노력은 무척 다양했지만 상호주의 원칙을 포기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런 관점에서 문재인 정부가 ‘9·19 남북군사합의’에서 우리의 재래식 군사능력과 태세의 질적 우위를 일방적으로 포기한 것은 뼈아픈 실책이었다. 앞으로 북한 위협이 상존하는 한 더 이상 안보 수단을 희생하는 대가로 남북 협력의 공간을 넓히려는 시도는 없어야 한다.

다섯째, 대북 정책사업의 공론화로 투명성을 높여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지금처럼 정부 내 소수 비선 조직의 물밑 소통 방식으로는 국가 운명을 좌우할 중대한 의사 결정을 그르칠 위험이 크다.

결론적으로, 성공적인 분단관리의 첩경은 남한의 자강불식(自强不息)과 아울러 북한의 태도 변화와 개방을 유도하는 노력이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어느 순간 분단의 장벽을 넘어 통일의 문 앞에 서게 되는 가슴 벅찬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