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무슨 일이 생기면 ‘짱가’가 나타나 도와주는 건 만화에서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요즘 한국증시에서 이 만화같은 장면이 자주 목격된다.주가가 조정받으면 어김없이 ‘동학 개미’가 등장해 증시를 떠받친다. 오래동안 기관과 외국인의 ‘밥’이었던 개인투자자의 화려한 변신이다. ‘개미’라는 용어는 미약함이 담긴 작명이지만 ‘동학개미’라는 말은 꺾이지 않는 의지와 거대함의 상징이 되고 있다.
◆외국인·기관과 맞짱뜨는 ‘미친 화력’
지난 4일 코스피가 2.7% 급락, 1900선이 무너지자 어김없이 동학개미 군단이 출동했다. 이날 하루 매수액만 증시사상 최대인 1조7000억원을 기록했다. 기관이 9000억원, 외국인이 8000억원의 매도공세를 펼쳤지만 남김없이 받아냈다. ‘미친 동학개미’라는 탄성이 곳곳에서 터져나올 만큼 왕성한 매수세로 추락장을 막아냈다.
이날 뿐만 아니다. 깊은 조정이 나타나면 늘 개미들의 매수세가 들이닥친다. 지난달 1일 코스피가 3.94% 추락했을 때도 개미는 1조1500억원 어치를 순매수했다. 조정 때마다 '조'단위를 넘나드는 대규모 저가매수 유입되는 일이 벌써 서너달 째다. 자금이 바닥날 법도 하건만 정반대다. 매수규모는 점점 커지고 매수 대기 자금도 늘고 있다. 올들어 누적순매수는 26조원을 넘었다.
그 결과 한국증시는 상대적 강세다.코로나 쇼크에 휩쓸린 최근 3개월(7일 종가 기준) 코스피는 13% 내렸다.코스닥 하락률은 1%에 불과하다. 미국 다우 -19%,영국 FTSE -21%, 독일 DAX -21%,일본 -18%, 브라질 -32% 등 주요국 증시에 비해 두드러진 선방이다.
◆자금·지식·맷집…질적으로 달라진 개미들
동학개미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가세하면서 활성 증권계좌는 사상최대가 됐다. 누구인지 어떤 돈인지 정확히 알순 없다.하지만 20~30대가 다수인 것으로 전해진다. 올해 새로 생긴 개인 주식계좌의 절반 이상이 20~30대라는 점으로 유추한 것이다. 동학개미의 ‘최애 종목’인 삼성전자 주주명부를 까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수도권 거주 40~50대’를 동학개미의 주력으로 보는 견해도 나온다.
개미투자자의 약점을 대부분 보완한 업그레이드 버전이 동학개미다. 장기판의 졸같던 평범한 이들이 은둔고수나 비급(??)을 만나 초절정 고수가 된 뒤 집단출현한 듯한 생경함과 놀라움을 전한다. 개인은 전통적으로자금력, 투자 정보·지식, 결집력·일관성 등에서 열세여서 자본시장의 종속변수에 불과했다. 기관이나 외국인과의 전투에서 결코 이길 수 없다는 패배의식이 일상화됐다. 동학개미가 그 판도를 일시에 바꿨다.
변신을 부른 첫번째 배경은 든든한 ‘실탄’이다. 올들어 26조원어치를 사고도 매수대기자금인 고객예탁금은 줄기는 커녕 43조원로 급증했다. 압도적인 기관과 외국인의 ‘화력’에 힘없이 나가 떨어지던 나약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삼성전자 현대차 등의 우량주만 사들이며 매매결집력도 과시하고 있다. “코로나 부양책이 쏟아졌지만 급한 불을 끈 수준에 불과하다”며 “조심스레 분산투자하라”는 전문가들의 조언은 무시되기 일쑤다. 일생일대의 기회라는 듯 죽자고 우량주만 사들인다. 약간의 변화도 있다. 4월 개인 매수상위에는 KODEX 200선물인버스2X 등 하락시 수익을 얻는 종목이 매수 상위에 다수 올랐다.
◆‘새 세상’을 알리는 ‘새 인간형’
주가가 빠져도 그리 당황하지 않는 것도 큰 변화다. 오히려 더 산다. 1년이든 3년이든 오를 때까지 가져가면 그만이라는 시크한 태도다. IMF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 때 한국 대표 우량주들이 보여준 회복탄성에 대한 견고한 믿음이 배경이다. 지금까지의 투자성적표는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 공포가 절정이던 3월 코스피가 1400선까지 폭락했다가 1900대로 올랐기 때문이다. 동학개미를 보는 시선에서는 걱정과 기대가 교차한다. 그리고 그 시선은 투자승패에 집중된다.
하지만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새로운 투자인류의 등장 그 자체다. 기관 뺨치는 정보와 경제지식,멘탈로 무장한 낯선 무리의 등장은 투자의 승패 여부와 무관하게 금융시장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밖에 없는 ‘사건’이다.
물론 예전 급락장에도 반발 매수세가 유입되곤 했다. ‘큰 손’이라 불리는 자산가들이었다. 시장이 공포에 휩싸이면 발빠른 정보를 바탕으로 역발상 매수에 나섰다. 이들 자금은 ‘스마트 머니’로 불렸다. 하지만 스마트머니는 많을 때도 5~6조원 정도에 불과했다.리먼브러더스 사태가 터진 2008년 10월 스마트머니 유입액이 5조원이었다.반면 동학개미 자금은 3월 한달 동안에만 11조원에 달했다.
외국인·기관과 맞짱뜨는 동학개미의 힘은 ‘정보격차의 해소’에서 나온다. 그들은 온라인으로 24시간 수집한 세계의 투자정보들이 온라인상에서 공유한다.유튜브 등에선 통찰력 있는 ‘만렙’들이 분석을 내놓고 갑론을박한다. 윤석헌 금융감독원장이 동학개미를 “투기세력의 일종”이라며 “대부분 돈을 벌지 못할 것”이라는 한 말은 거대한 빙산의 부분만 본 무의미한 발언이었다.
◆자만 내려놓지 못하면 파국 맞을 수도
물론 동학개미가 주의해야할 점은 부지기수다. 우선 경험부족이다. IMF나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의 경험과 학습효과를 말하지만 20~30대의 경우 누군가로부터 들은 간접적인 지식일 뿐이다. 당시의 막막함을 직접 체험한 앞선 세대가 체득한 본능적 두려움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자신이 무언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만을 특히 경계해야 한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의 대부분은 온라인 상에 돌아다니는 다른 사람의 지식인 경우가 허다하다. 넷상에서 누군가의 견해에 휘둘리면서 ‘넓고 깊게 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냉정히 돌아봐야 한다. 지난친 확신은 실패의 지름길이다. ‘투자 귀재’라는 워런 버핏조차 올 1분기에만 497억 달러(61조원)의 천문학적 투자손실을 냈다. 세계최대 헤지펀드인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 CEO 레이 달리오 역시 코로나 사태에 대한 판단오류로 막대한 투자손실을 피하지 못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자신의 굳은 믿음이 정당한 것인지 하루에도 열두번씩 따져보는 겸손함이 필수다. 코로나 사태로 극명하게 드러난 현행 신용화폐제도의 취약점과 모순이 어떤 방식으로 해소되 나갈 것인지 큰 안목으로 보는 신중함과 노력도 절실하다.
역설적이지만 당장의 투자 성패에 초연하는 자세가 투자 성패를 결정하는 핵심이다. 지금 지더라도 더 강해지면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이고, 그 반대도 가능한 게 냉정한 투자의 세계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