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중견기업은 어디에 기대란 말인가

입력 2020-05-06 18:01
수정 2020-05-07 00:17
자동차 부품업체 P사는 요즘 은행의 높은 문턱을 넘지 못해 발을 구르고 있다. 이 회사가 인건비 등 운영자금, 시설투자비 등으로 당장 필요한 자금은 150억원. 하지만 은행이 요구하는 신용등급, 담보 등의 요건을 맞추지 못해 애를 먹고 있다. 평소 우량한 기업으로 꼽히던 P사가 자금난을 겪는 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영향이다. 현대·기아차는 물론 글로벌 자동차 기업 공장들이 잇달아 가동을 멈추면서 부품을 납품하지 못해 돈줄이 말랐다.

정책자금도 조달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보증서를 발급하는 신용보증기금 등의 보증한도액은 통상 30억원에 그쳐 사실상 대출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P사 대표는 “정부가 돈을 풀어 기업을 살리겠다고 강조하지만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고 하소연했다.

코로나 사태로 정부가 기업을 위해 다양한 금융지원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온기를 체감하지 못한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정부가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기업 안정화 지원방안’을 발표한 건 지난 3월 24일. 당시 정부는 소상공인, 중소기업 등의 긴급 자금 지원 등을 위한 명목으로 ‘100조원+α’ 규모의 민생·금융안정 패키지 프로그램을 내놨다. 소상공인·중소기업을 위한 금융지원(29조2000억원), 중소·중견기업 금융지원(29조1000억원) 등의 방안이 담겼다. 이런 정책자금은 기업에 제대로 흘러 들어가고 있을까.

지금까지 정부의 혜택을 받은 기업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은행의 요구 조건이 워낙 까다롭기 때문이다. 확실한 담보가 없으면 대출 신청 금액의 10분의 1도 받지 못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대구의 한 섬유업체는 담보 가치가 낮다는 이유로 연 7%의 고금리를 떠안는 조건으로 겨우 대출을 받았다. 이 회사 관계자는 “은행들이 지금 같은 위기 상황에 고리대금업자 같은 횡포를 부리고 있다”고 토로했다.

금융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인 건 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낀 중견기업들이다. 정부 지원의 무게중심이 소상공인과 중소·창업·벤처기업 쪽으로 쏠리면서 중견기업까지 정책자금의 혜택이 퍼지지 않고 있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기업 안정화 지원방안 발표 이후 중소·중견기업에 대한 지원 실적은 2조8000억원(4월 20일 기준)에 그쳤다. 같은 기간 소상공인·중소기업의 지원 실적(12조3000억원)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수치다.

중견기업은 매출이 제조업 기준 1500억원 이상인 기업으로 1차 협력업체(벤더)가 대다수다. 주로 소재·부품·장비를 생산하는 핵심 기업군이자 수출 첨병이기도 하다. 기업의 가치사슬 측면에서 대기업의 협력사이면서 2, 3차 벤더인 중소기업을 이끄는 기업 생태계의 허리 역할을 하는 것도 중견기업이다. 이들이 무너지면 중소업체들까지 연쇄적으로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중견기업에 대한 정책 지원을 과감히 늘려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성장 잠재력이 있지만 일시적으로 자금난에 빠진 중견기업에는 한시적이나마 정부가 보증 재원을 늘려 신용보증기금의 보증한도를 높이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코로나 사태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국가적 재난이다.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기 위해선 익숙한 관행과 기준을 깨는 상상력이 필요한 때다. 소 읽고 외양간 고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leewa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