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 인구 3분의 1을 죽음으로 내몬 흑사병은 실크로드를 따라 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번졌다. 아일랜드 코크대 연구진에 따르면 흑사병의 진원지는 중국이었다. 그러나 1차 대전 직후 5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독감 발원지는 스페인이 아니었다. 당시 미국 등 참전국들이 전시 언론통제 중이어서 스페인만 이를 자주 보도했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최근 코로나19 발원지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공방이 격해지고 있다. 미국이 연일 ‘중국 우한연구소 유출설’을 주장하자 중국은 ‘정치 쇼’라며 강하게 반박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자연 발원설’로 중국 편을 들고, 미국·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로 이뤄진 첩보동맹 ‘파이브 아이즈’는 ‘우한연구소 유출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들의 대결은 ‘진실 게임’을 넘어 ‘파워 게임’으로 번지는 양상이다. 국제정치학계는 미·중 신(新)냉전 시대의 도래와 국지적인 군사 충돌까지 우려하고 있다. 당장 양국이 무력시위를 벌이고 있는 남중국해와 대만해협에서 우발적인 충돌이 빚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새로운 무역전쟁으로 확산될 조짐도 보이고 있다. 미국이 관세 보복을 예고하자 세계 증시와 유가가 요동치고 있다. 지난달 미국 제조업 경기는 11년 만에 최악을 기록했고, 실업수당 청구자만 3030만 명에 달했다. 국제 공급망이 흔들리면서 중국에 거점을 둔 다국적기업의 80%가 리쇼어링(본국 회귀)을 검토하고 있다.
양국은 백신 개발 경쟁에서도 패권을 다투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대선을 치르는 올 연말 이전에 코로나19 백신이 나올 수 있다고 장담했다. 중국도 독자 백신 개발에 사활을 걸고 있다. 두 나라가 유럽연합(EU) 등의 공조 요구를 거부한 채 ‘선점 경쟁’에 목을 매자 각국은 백신을 무기로 한 또 다른 ‘세계 지배 야욕’을 걱정하고 있다.
미·중 파워 게임으로 국제질서가 재편되면 다른 나라들도 자국 이익을 위해 이합집산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탈(脫)G2에 따른 다극체제가 형성될 수도 있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의 지적처럼 ‘성곽 도시 시대’가 다시 올지 모른다. 코로나 사망자가 25만 명이 넘은 팬데믹(대유행) 상황에서도 주도권 다툼에 골몰하는 두 나라 또한 스스로의 성곽에 갇힐 수 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