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과장 & 이대리] "수평적 문화 만들자" 영어 닉네임 도입했지만

입력 2020-05-05 17:22
수정 2020-10-14 16:02

“챈들러, 어제 제프가 지시한 보고서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요, 제시카.”

국내 기업들이 격식 파괴와 원활한 소통을 위해 영어 이름을 도입하면서 예상한 모습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예컨대 “챈들러님, 어제 제프님께서 지시하신 보고서 여기 있습니다”처럼 ‘한국화’되고 있다.

외국계 회사나 스타트업처럼 직원 호칭을 영어 이름이나 ‘프로’ ‘매니저’ 등으로 바꾸는 대기업과 공기업이 늘고 있다. 대리 과장 차장 부장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식 직급 서열을 단순화하고, 수평적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자율적으로 일하는 문화를 정착시키겠다는 취지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기업들의 이런 시도가 모두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다. 영어 닉네임을 도입했다가 포기한 회사도 있다. 직장 문화의 근본적인 개선 없이 형식만 바꿨다가 실패한 사례로 꼽힌다.

어쏘시엇, 프로…권위 뺀 직제 탄생

비철금속기업인 LS니꼬동제련은 2년간의 준비를 거쳐 지난달 서열 중심의 직급을 없애고 역할 중심으로 직제를 개편했다.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이던 기존의 5단계 직급 체계를 어쏘시엇-매니저-시니어 매니저 등 3단계로 압축했다. 사원과 대리는 성장인재를 뜻하는 ‘어쏘시엇’, 과장과 차장은 주도적으로 업무를 하는 전문가라는 의미에서 ‘매니저’, 부장은 ‘시니어 매니저’로 통일했다. LS니꼬동제련 측은 “직급에 담긴 권위적인 측면을 쇄신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관련 동영상과 만화까지 제작해 배포하며 직원 공감대를 사는 데 공을 들였다.

아예 직급이 없는 조직도 있다.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운영하는 와디즈는 200여 명 직원 간 직급을 두지 않고 있다. 팀장, 임원 등 직책만 있다. 기본적으로는 모두가 서로를 “프로”라고 부른다. 이런 호칭이 상대방에 대한 ‘인정’의 의미를 담고 있어서 부르기만 해도 분위기가 좋아지는 효과가 있다고 회사는 설명했다. 와디즈 관계자는 “프로 호칭을 사용하면서 수평적인 문화와 효율적 업무 소통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대부분 직원이 경력직이어서 연공서열이 무의미하다는 판단이 이런 문화를 만든 측면도 있다.

전자상거래(e커머스) 기업인 쿠팡은 5년 전부터 직급에 상관없이 각자 지은 닉네임으로 서로를 부르고 있다. 대표도 예외가 없다. 직원들은 창업자인 김범석 대표를 ‘대표님’ 대신 ‘범(Bom)’이라고 호칭한다. 부서 간 원활한 소통에 크게 기여했다는 게 쿠팡의 설명이다. 쿠팡 관계자는 “이런 호칭 문화는 3년차 직원이 타 부서 10년차 직원에게 부담 없이 자료를 요청하고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말했다.

영어 닉네임 써도…무늬만 수평

호칭의 변화가 조직 내 권위주의 문화를 모두 허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장류진의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에는 모두가 영어 닉네임을 쓰지만 의사결정 방식은 전혀 수평적이지 않은 경기 성남 판교의 한 정보기술(IT) 회사 얘기가 등장한다.

“영어 이름을 지어서 쓰는 이유는 대표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다. 다들 대표나 이사와 이야기할 때는 ‘저번에 데이빗께서 요청하신…’ 혹은 ‘앤드류께서 말씀하신…’ 이러고 앉아 있다”는 소설 속 주인공의 발언이 나온다.

소설의 사례를 실제 판교 직장인들로부터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모바일 앱용 메신저를 개발하는 회사에 다니는 김모 과장(35)은 “책 내용이 우리 회사의 실상을 그대로 갖다 쓴 줄 알았다”고 했다. 그는 “호칭만 영어 닉네임으로 부를 뿐 감히 임원 말에 반론을 제기하는 직원은 없다”고 했다.

판교의 다른 회사 직원 오모 사원(29)은 “기획안에 대한 피드백을 듣고 싶어 단톡방(단체 모바일 채팅방)에 파일을 올렸다가 면박을 당했다”며 “호칭이 자유로워서 쉽게 생각했는데, 연차가 낮은 직원은 사수 선배와 먼저 상의해야 한다는 문화가 있었다”고 말했다.

무역회사 인사팀에서 근무하는 문모 차장(40)은 최근 다른 회사들처럼 영어 닉네임을 도입하려다가 포기했다. 인사팀은 영어 닉네임 제도의 효과가 좋으면 전체 부서로 확대할 계획이었다. 그는 “닉네임을 ‘빅터’로 정한 한 과장에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가 ‘빅터 과장님께서…’라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무 회사나 도입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고 씁쓸해했다. 건축설비업체 인사팀의 신모 대리(32)는 “영어 닉네임을 도입한 뒤에도 부장에게 허리 숙여 ‘마이크님 안녕하세요’라며 인사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호칭이 아니라 조직 문화가 바뀌어야

결국 호칭이 아니라 조직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을 김과장이대리들은 하고 있다. 수평적인 호칭을 도입하는 근본 취지를 고려한다면, 경영진이 조직 문화를 적극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서울의 한 핀테크(금융기술) 스타트업은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보수적인 분위기인 시중은행에서 팀장급들이 경력으로 입사했는데, 이에 따라 종전의 수평적 호칭 문화는 서서히 종적을 감췄다는 것이다.

외국계 컨설팅 기업에 다니는 윤모 사원(27)은 “아랫사람이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기존 호칭으로 부르더라도 윗선에서 이를 바로잡아 줄 정도로 의지가 있어야 한다”며 “지금처럼 호칭만 영어로 도입하면 영어 이름에 존칭하는 일이 계속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종필 기자 j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