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법인세 논쟁이 불거지고 있다. 이번 논쟁은 코로나19 경기부양을 위한 각국 정부의 구제금융을 조세회피처에 소재를 둔 기업에도 제공해야 하는지에서 촉발됐다. 일부 유럽연합(EU) 회원국은 법인세 실효세율이 낮은 영국과 네덜란드 등도 조세회피처 국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번 논쟁을 계기로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후 법인세를 더 낮춰 투자를 유치하려는 영국의 움직임에 EU가 제동을 걸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조세이전으로 EU 연 37兆 손실”
유럽연합(EU) 행정부인 집행위원회는 지난달 29일(현지시간) “다른 국가에 본사를 두거나 조세이전을 했다는 이유로 해당 기업을 구제금융 대상에서 제외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다만 EU가 정한 ‘조세피난처 블랙리스트’(조세 비협조국)에 소재한 기업에 대한 구제금융 금지는 원칙적으로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EU가 지정한 조세피난처 블랙리스트는 이달 기준 미국령 사모아·괌·버진아일랜드, 영국령 케이맨제도, 피지, 사모아, 오만, 트리니다드 토바고, 바누아투, 팔라우, 파나마, 세이셸 등 12곳이다.
앞서 프랑스, 이탈리아, 덴마크, 폴란드 등 일부 회원국 정부는 조세회피처에 소재를 둔 기업에는 구제금융 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내놨다. 브뤼노 르 마이어 프랑스 재무장관은 “조세피난처에 본사나 자회사를 둔 기업은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을 수 없다”고 밝혔다.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도 “구제금융을 받기를 원하는 기업들은 정부에 법인세를 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조세피난처가 단순히 EU가 지정한 블랙리스트 국가에만 머물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영국 국제 비정부기구(NGO)인 조세정의네트워크는 지난달 28일 ‘조세회피의 축’이라는 제목의 특별보고서를 발간했다. 보고서는 영국 스위스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를 유럽의 ‘조세피난처 4대 축’이라고 지적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올해 영국의 법인세율은 19.0%다. 스위스는 21.1%, 룩셈부르크 24.9% 네덜란드 25.0%다. 영국을 제외하면 OECD 평균(21.9%)에 비해 높다. 하지만 이는 명목 법인세 최고세율 기준이다.
세금 감면 등을 통해 기업들이 실제로 내는 법인세 실효세율은 이보다 훨씬 낮다. 룩셈부르크가 0.7%로 가장 낮다. 이어 △네덜란드(4.9%) △스위스(5.7%) △영국(10.5%) 순이다. 미국과 유럽 대기업 등이 세금을 덜 내기 위해 법인세 실효세율이 낮은 이들 국가로 매출과 이익을 이전하고 있다는 뜻이다.
인구가 60만여명에 불과한 룩셈부르크가 금융산업 허브로 불리며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보고서는 이들 4개국 때문에 다른 EU 회원국이 연간 276억달러(약 33조6500억원) 상당의 법인세 손실을 보고 있다고 분석했다.
주세페 콘테 이탈리아 총리는 최근 네덜란드 정부를 향해 ‘조세 덤핑’ 국가라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이탈리아에서 영업활동을 하는 기업들이 자국에 법인세를 내는 대신 법인세 실효세율이 낮은 네덜란드로 조세 이전을 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유럽 시민단체들은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EU 단일 법인세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하고 있다. 단일시장과 관세동맹이 핵심인 EU가 ‘하나의 유럽’이라는 대원칙에 맞춰 법인세도 통일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英 법인세 인하 영향 미칠까
영국과 스위스 네덜란드와 룩셈부르크는 EU 일부 회원국과 시민단체들의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이들 국가는 소재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기업에게 구제금융을 제공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우선 EU 집행위원회가 회원국인 네덜란드와 룩셈부르크에 대해선 법인세 실효세율을 높이라고 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이는 다른 회원국들도 마찬가지다. 가뜩이나 북부와 남부유럽 간 갈등이 심한 상황에서 법인세 논쟁까지 벌어질 경우 EU 분열을 더욱 부추길 수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는 EU 회원국이 아니다. 스위스는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리히텐슈타인과 함께 유럽자유무역연합(EFTA)에 가입돼 있다.
관건은 영국이다. 이번 법인세 논쟁이 영국과 EU의 향후 브렉시트 협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우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상당수의 조세피난처는 영국계다. 런던 금융가인 시티오브런던을 중심으로 영국령 케이맨제도, 맨섬, 저지 등이 촘촘한 네트워크로 형성돼 있다. 앞서 EU는 브렉시트 직후인 지난 2월 영국령 케이맨제도를 조세피난처 블랙리스트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더욱이 지난 1월31일 EU를 탈퇴한 영국은 연말까지 EU와 자유무역협정(FTA) 등 미래협정을 체결해야만 한다. 영국 정부는 노동과 조세, 정부 보조금 등 각종 분야에서 대대적인 규제 완화를 준비하고 있다.
EU 회원국일 때는 단일시장 규제에 가로막혀 시행하지 못했던 다양한 분야의 규제 완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다. 보리스 존슨 총리(사진)는 적극적인 시장 개방을 통해 영국을 이른바 ‘템스강의 싱가포르’로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법인세 인하다. 영국은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10년부터 경기 부양을 위해 법인세율을 28%에서 단계적으로 19%까지 낮췄다. 존슨 총리가 브렉시트 이후 기업 유치를 위해 법인세를 17%까지 인하하겠다는 당초 계획을 재추진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EU는 영국의 법인세 인하를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다. EU는 영국이 브렉시트 이후에도 EU와 교역을 지속하려면 세금 등 각종 분야에서 EU 규정을 따르라고 요구하고 있다. 법인세를 대폭 낮추지 말라는 뜻이다. 투자 유치 규모에서 EU 회원국들이 영국에 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EU는 영국이 법인세 인하 등을 통해 조세회피처가 되면 미래협정을 체결할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리시 수낙 영국 재무장관은 1일(현지시간) “조세피난처 소재 기업들을 구제금융에서 제외시키는 건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존슨 총리도 이날 “EU가 영국과 연말까지 브렉시트 미래협상을 맺으려면 세금 등에서 EU 규정을 따르라는 요구를 철회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런던=강경민 특파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