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제 직업은 프로골퍼가 아니라 아이들 영어 선생님이에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 속에서 찾은 ‘작은 행복’이죠.”
미국프로골프(PGA)투어 ‘4승 챔프’ 케빈 나(한국명 나상욱·37·WAAC·사진)의 말이다. 2001년 데뷔해 올해로 프로 생활 20년째에 접어든 ‘베테랑’에게도 코로나19가 가져온 삶의 변화는 컸다. PGA투어는 지난달 중순 열린 플레이어스챔피언십부터 무기한 휴식에 들어갔다. 그가 장기간 골프 클럽을 잡지 않은 건 몇 년 전 메디컬 익스텐션(병가)을 신청했던 때를 제외하면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가족과 머물고 있다는 케빈 나는 최근 전화 인터뷰에서 “365일 24시간 영업하던 라스베이거스 카지노까지 영업을 중단하니 사람들이 코로나19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기 시작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2019~2020시즌 우승 한 번을 포함해 ‘톱10’에 두 번 들며 ‘제2의 전성기’에 들어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랬던 그를 코로나19가 멈춰세웠다. 실전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라운드가 절실하지만 어린 자녀 둘을 건사하는 것만 해도 녹록지 않다. 의도치 않게 첫 ‘장기 휴가’를 보내는 그는 모처럼 ‘아빠 노릇’을 하느라 바쁘다고 했다. 케빈 나는 “골프 라운드는 쉰 지 한 달이 넘었고 대신 그 시간에 맏딸 소피아에게 하루 한 시간씩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며 “이제 겨우 한 달인데 짧은 시간에 소피아의 영어 실력이 부쩍 늘었다”고 했다.
웨지로만 20가지가 넘는 샷을 구사해 ‘웨지의 마술사’로 불리는 그는 “너무 오래 클럽을 잡지 않으니 ‘죄의식’이 든다”고도 했다. 결국 연습을 시작했다. 뒷마당에 설치한 ‘망’을 향해 공을 치는 히팅 연습이다. 케빈 나는 “평생 해온 게 골프여서인지 한 달 쉬었다고 실력이 확 녹슬지는 않더라. 볼 스피드도 시속 170마일(273㎞)로 여전하다”며 껄껄 웃었다.
PGA투어의 ‘포스트 코로나’ 첫 대회는 6월 11일로 예정된 찰스슈와브챌린지. 케빈 나는 이 대회 ‘디펜딩 챔피언’이다. 예정대로 찰스슈와브챌린지로 PGA투어가 재개한다면 최정상급 선수들이 출전 명단에 이름을 올릴 것이 유력하다. 케빈 나는 “동료 선수들도 빨리 복귀하고 싶어해 유명한 선수들이 정말 많이 참가할 것으로 보인다. 타이틀 방어가 훨씬 더 어려워졌다”고 했다.
케빈 나의 올 시즌 목표 중 하나는 메이저대회 우승. 그중에서도 가장 탐난다는 마스터스토너먼트는 11월12일(현지시간)로 일정이 변경됐다. 1934년 3월 열린 초대 대회를 제외하고 항상 4월에 개막한 마스터스가 ‘초겨울’에 가까운 11월에 개최되는 건 올해가 처음이다. 케빈 나는 “11월의 마스터스는 베테랑 선수들도 경험해보지 못한 완전히 다른 대회가 될 것”이라며 “날씨와 잔디 상태가 완전히 달라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선수들이 그린재킷을 입을 가능성도 그 어느 때보다 크다”고 내다봤다.
그는 “미국에 있는 한국 후배들이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텐데, 꼭 건강을 지키고 힘내라고 말하고 싶다. 시즌이 다시 시작하면 얼른 만나 밥 한끼 사주겠다”고 말했다.
조희찬 기자 etwood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