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회 조직위원회가 올해는 내가 잘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도 다른 대회와 마찬가지로 나의 모든 것을 쏟아 경기에 임할 것이다.”
테니스계 ‘빅3’ 중 하나인 라파엘 나달이 마드리드오픈을 앞두고 내놓은 출사표다. ‘클레이코드의 제왕’다운 자신감은 찾아볼 수 없다. 나달은 클레이코트 대회인 마드리드오픈에서 무려 다섯 차례나 우승을 차지했다. 그가 이처럼 조심스러운 이유는 이번 대회에선 라켓 대신 게임 패드를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오프라인 대회를 열기 어려워지자 대회 조직위는 실망한 팬들을 달래기 위해 e스포츠 이벤트를 마련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조되면서 중단된 프로 스포츠의 빈자리를 e스포츠가 빠르게 채워 나가고 있다. 축구, 야구, 농구, 골프 등 각국의 프로리그가 모두 멈춰선 반면 온라인에서 대결을 펼치는 e스포츠는 별다른 타격 없이 리그를 열고 있다. 마드리드오픈처럼 e스포츠가 아예 오프라인 대회를 대체하기도 한다. e스포츠가 전염병 대유행으로 지친 세계인의 마음을 달래주면서 때 아닌 특수를 누리고 있다. e스포츠 팬이 급격히 늘어나자 BMW, 페이스북 등 글로벌 기업들도 게임 관련 투자를 늘리고 있다.
○e스포츠로 대체되는 스포츠 리그들
27일 개막한 ‘마드리드오픈 버추얼 프로 채리티 이벤트’는 매년 스페인에서 열리는 마드리드오픈을 대신한 대회다. 나달을 포함해 앤디 머레이, 다비드 고팡, 키키 베르텐스 등 세계 최정상급 선수들이 참가했다. 상금은 15만유로(약 2억원)에 이른다. 온라인 경기를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중계하고 경기가 끝나면 경기 분석과 승리 선수 인터뷰도 진행한다.
리그가 중단된 스페인 프로축구리그 라리가도 온라인 게임을 이용한 ‘피파20’ 대회를 통해 아쉬움을 달랬다. 지난달 열린 온라인 축구대회에는 19개 구단, 19명의 선수가 도전했다. 지난달 23일 열린 결승전에서는 레알 마드리드의 마르코 아센시오가 레가네스 소속 아이토르 루이발을 4-1로 꺾었다. 아센시오는 결승전에서 자신의 캐릭터로 2골을 넣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결승전은 17만여 명이 시청해 흥행에도 성공했다.
미국의 인기 자동차경주대회인 나스카 선수들도 온라인 대회를 열었다. 레이싱 경기 환경을 게임으로 옮긴 아이레이싱을 통해서다. 지난달 22일 열린 온라인 레이싱 대회에는 30여 명이 참가했다. 모든 경기는 폭스스포츠 채널을 통해 중계됐다. 시청률 조사기관 닐슨에 따르면 지난달 23일 개막식 중계 시청자는 90만3000명으로 집계됐다. 역대 미국 e스포츠 중계 중 최대 시청자 수다.
국내에서도 스포츠 선수들이 온라인 대회에 나섰다. 지난달 22일 한국프로축구연맹은 국내 프로축구 K리그 선수들이 참가하는 온라인 축구 게임대회 ‘K리그 랜선 토너먼트’를 열었다. 피파온라인4로 승부를 겨뤘고 성남이 우승을 차지했다. 축구 팬 3000명이 몰려 예상보다 높은 관심을 끌었다.
○e스포츠 리그 순항
기존 e스포츠 리그들도 코로나19에 아랑곳하지 않고 순항하고 있다. 지난 2월 5일 개막한 ‘2020 우리은행 리그오브레전드 챔피언스 코리아(LCK) 스프링’의 시청자 수는 지난해보다 더 늘어났다. 25일 열린 결승전에서는 T1이 3-0으로 젠지 e스포츠를 누르며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이날 페이스북을 통해 결승을 지켜본 순간 최고 시청자 수는 약 250만 명에 달했다. e스포츠 통계 사이트 ‘e스포츠 차트’에 따르면 올해 LCK 경기당 평균 시청자는 20만1923명이었다. 지난해(12만6127명)보다 약 8만 명(60.1%) 늘었다.
인터넷 방송 플랫폼 아프리카TV는 이달 들어서도 각종 e스포츠 대회를 열고 있다. 6일 ‘2020 아프리카TV 워크래프트3 리그 시즌1’을 시작으로 11일에는 ‘2020 글로벌 스타크래프트2 리그 시즌1’의 막을 올렸다. 아프리카TV 관계자는 “코로나19에도 e스포츠 시청자는 오히려 더 늘어나고 있다”며 “아프리카TV는 관련 행사들을 무리없이 이어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때가 기회”…e스포츠 투자 늘리는 기업
코로나19 이후 e스포츠 시장에 쏠린 관심은 일회성으로 끝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새롭게 e스포츠를 접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게임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인식이 개선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조사업체 뉴주는 올해 e스포츠 시청자가 5억 명에 육박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스폰서십, 중계권, 스트리밍 등을 포함한 시장 규모도 11억달러(약 1조3500억원)로 지난해 대비 16%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자동차, 정보기술(IT) 분야의 글로벌 기업들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속속 e스포츠로 눈을 돌리고 있다. BMW는 지난 16일 e스포츠 구단 T1과 스폰서 파트너십 계약을 체결했다. T1 선수들은 BMW 로고가 부착된 유니폼을 입고 BMW X7 등 최신형 차량을 지원받는다. 앞서 젠지 e스포츠는 메르세데스벤츠 코리아의 한국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와 후원 계약을 맺었다.
게임대회 등을 중계하는 ‘보는 게임’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하다. 페이스북은 지난 20일 게임 생중계 전용 앱을 선보였다. 기존 페이스북 메인 앱에서도 게임 생중계 서비스를 일부 운영했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중계 시장의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별도 앱을 내놨다. 선발주자인 아마존 ‘트위치’, 구글 ‘유튜브’와의 일전이 불가피해졌다. SK텔레콤도 게임 생중계 플랫폼을 내놓을 예정이다. 지난달 싱가포르 통신사 싱텔, 태국 통신사 AIS와 e스포츠 공동 사업을 위해 합작사를 설립했다. 아시아 지역을 타깃으로 연내 출시를 목표로 하고 있다.
구민기 기자 koo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