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병석 칼럼] 그리스로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입력 2020-04-22 18:22
수정 2020-04-23 00:24
#그리스 최대 항구이자 ‘아테네의 관문’인 피레우스항은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교두보가 됐다. 2010년 국가파산 위기에 처한 그리스가 이 항구를 중국에 팔아넘겨서다.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 대륙이 교차하는 피레우스항은 중국 국유기업인 중국원양해운(COSCO)이 운영 중이다. 그리스의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총리가 작년 11월 아테네를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피레우스항을 찾았을 때 항만관리국 건물 위에 펄럭인 건 그리스 국기가 아니라 오성홍기(五星紅旗)였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럽중앙은행(ECB)으로부터 2010~2018년 총 3100억유로(약 415조원)의 구제금융을 받은 그리스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한때 청년실업률이 50%를 넘어 거리엔 백수들이 넘쳤고, 가까스로 일자리를 구한 젊은이들도 저임금에 허덕였다. 그리스의 최저임금은 작년 기준 월 650유로(약 86만원)로 우리나라 최저임금 월 180만원(시급 8590원 기준)의 절반도 안 된다. 세계 1위 해운강국 그리스의 비참한 현실이다.

그리스가 망국의 길로 들어선 시발점은 1981년 10월 총선이었다. 당시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가 이끈 좌파 사회당이 총 300석 의회의 173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둔 뒤 펼친 포퓰리즘(대중 인기영합주의) 정책이 그리스의 운명을 바꿔놨다. 파판드레우는 1981~1996년 사이 두 차례에 걸쳐 11년간 집권했다. 그가 남긴 가장 유명한 말은 “국민이 원하면 다 줘라”였다.

그는 출근 시간대 대중교통 요금을 무료화하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실시했다. 65세 이상 무주택자에겐 주택수당으로 월 360유로(약 48만원), 1인 가구엔 매달 200유로(약 27만원)를 나눠줬다. 안정적이고 월급 많은 공무원 수를 계속 늘렸고, 연금소득대체율(퇴직 전 연봉 대비 지급액 비율)도 95%까지 끌어올렸다. 야당에선 재정 붕괴를 막기 위해 ‘더 이상은 안 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하지만 포퓰리즘의 달콤함을 맛본 국민과 기득권층이 돼버린 공무원 및 노조의 반대에 번번이 묻혀버렸다.

지난주 4·15 국회의원 총선이 있었다. 이번 선거는 여러 면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여당이 개헌 빼고는 다 할 수 있다는 180석을 얻어 압승한 것뿐만이 아니다.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전 국민 대상의 현금살포 공약이 난무한 선거였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여당 원내대표는 유세 때 “OOO 후보를 당선시켜 주면 국민 모두에게 긴급재난지원금을 드리겠다”고 약속했고, 제1야당 대표도 “국민 1인당 50만원씩을 주겠다”고 공약했다. 심지어 18세 이상 국민에게 1억원씩 나눠주겠다는 정당도 나왔다. 이에 질세라 박원순 서울시장, 이재명 경기지사 등 여권의 잠룡들은 지역주민에게 각종 명목으로 수십만원씩 현금 지급을 시작했다.

포퓰리즘은 마약과 같아 멀쩡한 사람도 타락시킨다고 한다. 경기도의 재난기본소득 10만원을 받기 위해 행정복지센터에 몰린 시민들의 아웅다웅 다투는 소리, 소득 하위 70%에 대한 정부의 재난지원금 지급 방침에 “왜 나는 안 주냐”는 일부 고소득층의 볼멘소리를 들으면 그런 것 같다. 월 27만원짜리 노인일자리 사업에 참여한 어르신들이 지난 총선 때 아들딸에게 전화해 “용돈을 계속 받으려면 여당을 찍어야 한다”고 설득했다는 얘기에선 포퓰리즘의 힘을 엿볼 수 있다.

이 마력을 절감한 정치인들은 다음 선거 때 아마 전 국민 기본소득과 같은 더 센 포퓰리즘 공약을 들고나올 게 분명하다. 한번 공돈 맛을 본 유권자들을 홀리려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유혹에 국민이 눈멀면 우리도 그리스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없다.

마약은 처음부터 손을 대지 말아야 한다. 국민들이 초기에 포퓰리즘을 단호히 뿌리치지 않으면 결국 나라 곳간은 거덜나고 우리 미래는 파탄난다. 선거는 끝났지만 이제라도 어떤 공약이 ‘마약’이고, 누가 ‘마약장수’인지 구별해 내는 이성의 눈을 떠야 한다. 4·15 총선이 망국의 출발점이 되게 해선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부산항 인천항에도 오성홍기가 휘날릴 날이 올지 모른다.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