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태 키운 광주시…'노동이사제 말바꾸기'만 여섯 번

입력 2020-04-22 17:33
수정 2020-10-15 16:40

연봉 3500만원 수준의 완성차 공장을 세워 1만여 개(협력업체 포함)의 신규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광주형 일자리 사업’이 좌초 직전 상황에 몰렸다. 사업의 한 축인 노동계는 기존 합의를 무시한 채 무리한 요구를 이어가고 있고, 사업 주체인 광주광역시는 ‘오락가락 행보’를 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노동계 요구를 수용할 경우 경제성이 떨어져 사업을 시작하더라도 1~2년 안에 공장 문을 닫으면서 모두 패자가 되는 최악의 결과가 나올 것으로 전망했다.


정치권도 개입할 태세

22일 업계에 따르면 광주지역의 21대 총선 당선자 8명은 지난 19일 한국노동조합총연맹 광주지역본부를 찾았다. 이들은 “광주형 일자리 사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경영진이 노동을 존중하고, 노동 존중이 실현될 수 있는 경영구조가 확립돼야 한다”고 말했다. 비공개로 이뤄진 간담회에서도 당선자들은 노동계의 의견이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전해졌다.

광주형 일자리 사업을 실행할 합작법인인 광주글로벌모터스의 주주들은 “노동계의 요구를 수용하면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지난해 광주시가 마련한 협약에 근거해 투자를 결정했는데, 이제 와서 협약을 바꾸는 건 투자자를 농락하는 행위라는 지적이다. 노동계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사업성이 떨어진다는 우려도 나온다. 노동계의 요구를 다 받아들이면 사업 유지의 전제인 ‘적정 임금’이 무너진다는 설명이다.

광주시와 현대자동차 등 투자자들은 당시 △주 44시간 근무 △근로자 평균 초임 연봉 3500만원 △노사 상생협의체 구성 △35만 대 생산 시까지 생산협의회 결정사항 유지(임금수준 유지) △동반성장과 상생협력 도모 △소통 및 투명경영 실현 등을 담은 협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노동계는 노동이사제 도입, 원·하청 관계 개선, 경영진 교체, 임원 연봉 제한 등 협약에 없던 내용을 거듭 요구하고 있다.

주주들이 지난 8일 긴급 주주총회를 열고 “오는 29일까지 기존에 합의한 협약 이행이 정상화되지 않으면 사업 진행 여부 등을 재논의하겠다”고 결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경영권 개입 시도하는 노동계

노동이사제는 근로자 대표가 이사회에 참여해 발언권과 의결권을 행사하는 제도다. 전문가들은 노동이사제가 도입되면 글로벌모터스의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노동이사제는 독일 등 일부 유럽 국가에서만 시행하고 있고, 일본 등은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해 도입 방침을 철회했다. 일부 독일 기업은 경쟁력이 약화된다는 이유로 이 제도를 폐지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노동이사제를 도입하면 이사회에 참여한 노동계 이사들이 수년 내 근로자 임금을 올리자고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미국 유나이티드항공이 2002년 자구안을 추진하려 했지만 이사회 내 근로자대표 3인이 이를 거부하면서 결국 파산보호 신청을 한 사례 등도 있다.

노동계는 원·하청 관계 개선을 반복적으로 요청하고 있다. 투자협약에 “동반성장과 상생협력을 도모한다”는 내용이 있는데도 이를 계속 요구하는 건 ‘동일 노동 동일 임금’ 및 ‘원·하청 이익공유제’를 시행하라는 압박이라는 분석이다. 업계에서는 이익공유제를 시행하면 글로벌모터스 수익성이 크게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동일 노동, 동일 임금 주장은 현대차 등 다른 완성차 업체와 임금 수준을 맞추자는 논리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노·사·민·정이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추진키로 한 완성차 공장이라는 본래 취지는 사라지고 또 하나의 고임금 완성차 공장이 추가된다는 지적이다.

글로벌모터스 경영진을 교체하고 임원의 연봉을 제한하라는 노동계의 요구도 무리라는 게 중론이다. 노동계가 반대한다는 이유로 주총에서 적법하게 선임된 임원을 교체하면 경영진이 한국노총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임원의 연봉을 직원 2배 이내로 책정하라는 요구도 추후 직원 임금 인상 요구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오락가락 광주시가 가장 문제”

업계에서는 비합리적인 요구를 반복하는 노동계도 문제지만, 광주시가 중심을 못 잡으면서 문제가 더 커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업을 책임져야 할 주체가 매번 노동계에 휘둘리면서 지난해 1월 체결된 투자협약을 무력화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광주시는 노동이사제 도입 문제를 놓고서 지금까지 여섯 차례나 말을 바꿨다. 한국노총 광주본부 관계자를 만나서는 “노동이사제 도입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하고, 투자자들에게는 “도입할 뜻이 없다”고 말하는 식이다. 올 들어서도 광주시는 노동이사제에 대해 두 차례 말을 바꿨다.

투자에 참여한 한 부품사 대표는 “사업 주체인 광주시를 믿었는데 이제는 신뢰가 사라졌다”며 “광주형 일자리가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광주시가 중심을 잡아야 한다”고 꼬집었다.

도병욱/광주=임동률 기자 do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