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요한 대구시청년정책과장
<</span>기고>코로나19 생활치료센터 ‘빈손의 창조자’들과 15일간의 동행
3월1일 대구·경북 지역의 코로나19 확진자가 3000명을 넘어서고, 병상 부족 상황이 심화되면서 시민이 돌아가시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졌다. 이날 정부는 코로나19대응 치료체계를 변경했다. 환자 중증도를 4단계로 나눠 경증환자의 모니터링·치료와 감염병 전파차단을 위해 생활치료센터를 대책으로 내놓았다.
대구지역 경증환자의 격리·돌봄을 위해 국가 운영시설이나 숙박시설을 활용해 전국에 15개의 생활치료센터가 구축·운영됐다. 필자는 국민연금관리공단에서 운영하는 충북 제천 청풍리조트를 생활치료센터로 구축·운영하는 책임을 맡았다.
3월6일 아침 10명의 대구시 공무원은 전날 밤 급히 꾸린 옷가지를 넣은 가방
을 자동차에 싣고 제천으로 향했다. ‘인사발령’은 하루가 지나서야 확인을 했다. 우리 손에 쥐어진 것은 ‘생활치료센터 준비사항’ 과 ‘경비전액은 국가부담이므로 해당지역 업체에 양해를 구해 우선 공급하시기 바란다.”라는 ‘코로나19 재정집행 안내’가 전부였다.
3월 8일 오전 155명의 경증환자를 입소시켜야 하는 ‘미션 임파서블’ 아래 이틀 동안 전국에서 43명의 의료진과 파견근무자들이 모였다. 155명이 최소 2주간 1인1실에서 격리생활을 할 수 있도록 각종 생활물품을 현지에서 조달했다. 제천시의 식당업을 하는 주민들은 팀을 구성해 도시락을 공급하는 역할을 자원했다. 제천시가 식품위생을 책임지고 진행해 제천시의 서민경제에도 도움이 되고 입소자들에게 신선한 음식을 제공할 수 있었다.
우리들은 ‘빈손의 창조자’들이 돼있었다. 방역과 폐기물처리 용역도 현지서 조달해야했다. 인구 13만의 소도시에서 제대로 된 업체를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구에서 전문가를 초청해 교육 후 방역업체를 현장에 투입했다. 폐기물업체 인력들은 처음 방호복을 입었다. ‘선 실행, 후 계약’, 외지업체는 국가라 하더라도 ‘외상거래’는 불안해 했다. ‘메르스’ 이후 ‘감사(監査)’를 받았던 공무원들의 ‘트라우마’를 떠올려주는 동료도 있었지만 결국, “공무원이 지급을 책임진다.”라는 ‘확인서’를 써줬다.
15개 생활치료센터에 파견된 대구시 공무원들은 훗날 ‘감사’ 받을 각오로 일을 해야했다. 그 결과 4월 7일 현재 2400여명의 경증환자가 건강하게 퇴소했고 코로나19의 큰불은 잡을 수 있었다. 경증환자들의 고충도 컸다. 1차 검사가 ‘음성’이 나왔지만, 2차 검사가 ‘양성’으로 나오는 날의 심정은 당사자가 아니면 모른다. 그날 심리상담가 선생님은 제대로 식사도 못했다.
생활치료센터의 운영목표와 원칙, 입소자들의 개인적인 딱한 사정과 인간적인 배려사이에서 담장 위를 걷는 깊은 고민들이 많았다. 불안하고, 답답하다며, “막걸리 두병만 줄 수 없느냐?”고 전화주신 어르신도 있었다. 입소자들이 감기에 걸리면 안 된다며, 늦은 밤 생애 처음 방호복을 입고, 객실의 난방기를 수리하던 시설관리 근무자도 잊을 수 없다. 주말에 왕복 5시간을 달려 3명의 퇴소자를 대구로 이송한 대구시 공무원도 있었다.
의료진들은 매일 경증환자들을 직접 돌보고 그룹별 온라인 채팅방을 운영하며 환자를 돌봤다. 국방부소속의 젊은 장교들은 하루 세 번씩 방호복을 갈아입고 155명에게 도시락을 제공했다. 입소자들의 택배나 후원물품 배달도 그들의 몫이었다.
경찰청 근무자들은 24시간 CCTV 모니터링과 안전을 맡았다. 생활치료센터는 병원이 아니기 때문에 의사가 있어도 수기처방전’을 발행해야했다. 하지만 이걸로 약국에서 약을 바로 살수는 없었다. 제천보건소가 수기처방전을 정식 처방전으로 바꾸는 걸 도왔고 이걸로 약국에서 약을 처방 받아 배달했다.
전 국의 생활치료센터는 무에서 유를 창출한 ‘적극행정’의 현장이 됐다. 어느새 생활치료센터의 운영은 세계 각국이 부러워하는 한국의 방역모델이 돼 있었다.
김요한 대구시청년정책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