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과 스웨덴, 네덜란드, 아일랜드에는 공통점이 있다. 한동안 ‘구제불능’으로 여겨졌던 만성적 경제·사회 위기를 딛고 ‘모범국가’로 탈바꿈했다는 점이다. 2005년 실업률이 11%를 넘으며 ‘유럽의 병자(病者)’ 소리까지 들었던 독일을 반전시킨 주역은 좌파 사회민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부다. “최선의 사회보장은 경제발전”이란 말로 노동계 대표를 설득해 일자리 증대를 위한 노동 유연성 강화 등 ‘하르츠 개혁’을 이끌어냈다. 스웨덴은 1938년 ‘살트셰바덴 협약’으로 노사 상생모델을 확립하기 전까지는 ‘유럽의 골칫거리’였다. 극심한 노사갈등으로 경제가 위축되고 일자리가 쪼그라들면서 인구의 5분의 1이 살길을 찾아 이민을 떠날 정도였다.
그랬던 나라를 기사회생시킨 주인공 역시 사회민주당 정부다. 노조와 기업, 정부 대표가 담판을 벌인 끝에 ‘노조는 기업의 경영지배권을 보장하고, 기업은 일자리 제공과 투자에 노력한다’는 합의를 봤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스웨덴을 국빈방문했을 때 살트셰바덴 현장을 찾아 “이곳에서 시작된 사회적 대타협이 오늘의 스웨덴 번영을 일궈냈다”는 찬사를 보냈다.
네덜란드는 1970년대 만성화된 노사갈등과 30%를 넘는 청년실업률에 시달리며 ‘네덜란드병(Dutch disease)’이라는 말을 탄생시켰지만, 1982년 노사정 대타협으로 새 길을 찾아냈다. 동일노동·동일임금을 보장하는 대신 최저임금과 공공부문 임금을 동결하고 시간제 근로를 활성화하는 내용의 ‘바세나르 협약’으로 노사관계 안정과 경제발전 토대를 마련했다.
아일랜드는 더 극적이다. 감자 기근으로 1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가난이 뿌리 깊어 ‘유럽의 낙오자’로 불리던 나라가 식민종주국이었던 영국을 앞지르는 고소득국가로 변모했다. 1987년 노사 상호 양보와 상생을 핵심으로 하는 ‘사회연대협약’에 성공한 덕분이다. 그 바탕 위에서 유럽 최저 수준으로의 세율 인하와 과감한 대외개방으로 해외 기업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대도약의 기적을 이뤘다.
이들 국가가 일궈낸 ‘대역전’의 주역을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정부’다. 숱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노조와 기업, 여러 정파와 사회단체를 조율해 타협을 이끌어내는 일은 몹시 험난하다. 정치 지도자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다. 독일 슈뢰더 총리는 핵심 지지기반이었던 노조 지도부와 결판을 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다수 노조원의 반발이 잇따랐고, 그 여파로 다음 선거에서 패배했다. “하르츠 개혁은 슈뢰더의 정치적 자살행위였다”는 당시 언론 보도는 나라를 벼랑 끝에서 건져낸 그에 대한 역설적 찬사다.
네 나라 사례를 돌아본 것은 지금의 대한민국에 필요한 메시지를 찾기 위해서다. 한국은 기업투자와 고용, 수출, 소비 등이 총체적인 부진에 빠져 있다. 여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휘청이는 기업이 늘어나면서 지난달 체감실업률이 14.4%(청년층은 26.6%)까지 치솟았다. 코로나 사태로 가려졌을 뿐, 우리 경제는 투자와 소비 부진 등으로 이미 ‘기저질환’이 심각한 상태라는 국내외 전문가들의 진단이 적지 않다. 정부는 부인하지만 임금과 근로시간, 투자와 경영의사 결정 등에서 기업의 선택권을 빼앗는 이념형 정책이 쏟아지면서 경제 활력이 급속히 둔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정부가 표방하는 ‘친노동’ 정책 상당수가 거대 노조원들의 기득권만 지켜줄 뿐, 청장년층의 신규 일자리는 오히려 가로막는 ‘친노조’ 편향이라는 비판도 끊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15일 치러진 21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집권당에 유례없는 승리를 안겨줬다. 여당은 국회 의석 5분의 3(180석)을 확보한 덕분에 헌법 개정 말고는 어떤 일도 단독으로 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갖게 됐다. 문 대통령은 “무거운 책임감을 안고 더 겸허하게 국민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겠다”고 했다. 어떤 책임감으로 어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인지가 중요하다. 우리나라와 국민, 일자리 주역인 기업이 처한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대한 인식과 진단부터 새롭게 해야 할 것이다.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압승을 안겨준 유권자들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훗날 역사는 21대 총선 결과를 어떻게 평가할지 정부 여당에 ‘전권’이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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