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시장 일일 거래대금 7조원.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돈이 오가는 이곳 여의도. 나는 부자가 되고 싶었다.”
가난한 복분자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증권사 신입사원으로 서울 여의도에 입성한 조일현(류준열 분). 부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은 넘치지만 정작 영업의 무기가 될 만한 언변, 인맥, 학연 등은 빈약하다. 거래수수료 0원을 기록하는 날들의 연속, 어느 날 같은 팀 멤버가 일현에게 ‘번호표’(유지태 분)라는 별명의 부티크(비공식 투자회사) 투자자를 소개한다. 번호표는 거액의 자금을 움직이는 주가조작 ‘선수’다. 그를 만나며 일현은 주가조작 세계에 빠져든다.
2019년 개봉한 ‘돈’은 증권사 법인영업팀 주식 브로커 조일현이 주식 불공정거래 세력과 합세해 머니게임을 벌이는 과정을 다룬 영화다. 2009년 개봉한 ‘작전’ 이후 10년 만에 여의도 증권가를 소재로 한 영화로 주목받았다. 일반투자자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펀드매니저와 증권사 브로커의 세계를 깊숙이 다뤄 증권가에서도 상당한 화제를 모았다. 올 들어 개인투자자들이 주식시장에서 27조원이 넘는 기록적인 순매수에 나서면서 ‘동학개미운동’이 유행어가 될 정도로 주식시장이 뜨거워지자 이 영화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현실 같은 영화, 영화 같은 현실
영화 속 번호표가 이끄는 세력은 주식을 미리 사둔 뒤 통정매매를 통해 주가를 부양시켜 시장에 떠넘기는 방식으로 부를 쌓는다. 통정매매는 세력끼리 매매를 주고받으며 주가를 조작하고, 다른 시장 참여자들의 매수세를 유인하는 불법 매매 기법이다. 이 과정에서 스프레드 거래와 프로그램 매매, 공매도 등 각종 금융 기법이 등장한다. 번호표는 필요하다면 주가를 움직이기 위해 기업 공장에 불을 지르고, 작전 내역을 유출하려는 매니저를 살해할 정도로 극단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주가조작에 대해 증권업계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현실적인 얘기”라는 반응이다. 오히려 “10여 명이 참여하는 대형 작전인데 총 수익금이 수십억원에 불과한 것으로 묘사된 부분은 너무 소박하다”는 지적까지 나왔다. 실제로 증권업계는 과거에도 수차례 제도권 내 인물들이 여러 가지 형태의 불공정거래에 가담한 사실이 밝혀져 홍역을 앓아왔다. 심지어 주가조작 과정에서 정치권과의 연루설, 조직폭력배와의 연계설 등도 제기됐다.
현실과 비슷한 사례는 영화 속 여러 장면에 등장한다. 지난 1월 서울남부지검은 전직 증권사 애널리스트 오씨를 구속했다. 오씨는 특정 코스닥 상장업체의 주식을 미리 사두고 해당 기업에 우호적인 보고서를 발간해 주가를 부양하는 방식으로 수십억원대 시세 차익을 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을 두고 증권가에서는 “오씨가 수십억원이 넘는 서울 반포동의 고급 아파트를 현금으로 결제했다가 금융당국의 의심선상에 올랐다”는 말이 돌았다. 영화 속 일현이 고급 아파트를 계약했다가 금융감독원의 의심을 산 장면과 비슷하다.
2013년에는 CJ ENM의 3분기 실적 발표를 앞두고 애널리스트를 통해 악화된 실적 자료를 미리 입수한 펀드매니저들이 공시 이전에 주식 400억원어치를 매도했다. 공시 이후 주가가 폭락하자 매니저들의 매도 물량을 받아낸 개인투자자들은 막대한 손실을 떠안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자본시장법이 개정돼 기존에 불공정 거래에 포함되지 않았던 미공개 중요 정보 이용 행위가 처벌 대상으로 지정됐다.
주식시장에서는 정보가 곧 돈
경제학에서는 번호표와 같은 작전세력이 시장을 수차례 농락할 수 있는 것은 주식시장에 존재하는 ‘정보의 비대칭성’ 때문이라고 본다. 주식시장을 비롯한 모든 시장이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거래에 영향을 미치는 정보가 공개돼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거리가 멀다. 특히 주식시장에서 거래 대상이 되는 것은 형태가 없는 기업의 소유권으로, 전적으로 시장 참여자들이 기업의 장래 수익성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따라 수요와 공급이 형성된다.
문제는 기관과 외국인, 개인투자자들이 난립하는 주식시장에서 시장 참여자 간의 정보 수준이 극단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거래량이 적고 인지도가 낮은 중소형주일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강하다. 정보열위, 즉 정보의 수준이 낮거나 양이 적은 투자자는 정보우위에 있는 투자자를 상대로 불리한 조건에 물건을 구매하거나 판매하는 ‘역선택’을 범한다. 정보의 비대칭성으로 인한 시장 실패는 미시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대표적인 시장 실패 사례 중 하나다.
영화 속 번호표를 비롯한 작전세력이 흔히 사용하는 주가조작 방식은 <그래프 1>과 같다. 먼저 세력은 시장에 기업가치를 왜곡하는 정보를 푼다. 호재성 가짜뉴스일 수도 있고, 일현을 비롯한 기관투자가를 동원한 통정매매일 수도 있다. 정보에 현혹된 투자자들은 기업의 내재가치가 실제보다 높다고 판단하고, 주식 매매에 뛰어들면서 수요 곡선은 D에서 D1으로 우측으로 이동한다. 그 결과 거래량은 증가(Q→Q1)하고, 번호표는 높아진 가격(P→P1)에 기존 물량을 매도할 수 있게 된다.
동학개미도 작전 피해자 될 수 있어
영화는 주가조작 참여자들에게만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결말에 이르러 번호표의 작전에 휘말린 일현의 친구 우성이의 아버지가 회사를 잃을 위기에 처하지만, 번호표의 뒤를 찌른 일현의 ‘역작전’을 통해 구제된다. 실제로는 어떨까. 현실의 투자자들은 일현과 번호표가 온갖 방식으로 부양한 고가의 주식을 팔아치우고 환호하는 사이, 원래 가격으로 급락한 주식을 보며 절규하고 있을 것이다.
금융당국은 최근 동학개미 열풍으로 주식 세계에 입문한 초보 투자자들이 막대한 손실을 볼 수 있다고 연일 경고하고 있다. 올 들어 개인은 지난 16일까지 주식시장에서 27조5759억원(유가증권시장 23조3356억원, 코스닥시장 4조2403억원)어치를 순매수했다. 같은 기간 역대 최대 규모다. 개인투자자 시장 점유율 1위 증권사인 키움증권에서는 지난달에만 40만 개가 넘는 신규 계좌가 개설됐다. 정보 수준이 낮고, 투자 경험이 없는 개인투자자들이 대거 시장에 합류하면서 금융당국은 이들이 작전세력의 먹잇감이 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미 징후들은 발견되고 있다. 개인투자자들이 가장 쉽게 휘말리는 테마주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특수를 맞아 활개치고 있다. 테마주는 기업 실적과 무관한 정보에 따라 주가가 요동치는 종목으로, 추종 매매 시 세력들의 작전에 휘말릴 위험이 크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코로나19 테마주 69개 종목의 최근 두 달간 평균 주가 변동률은 107.1%로, 코스피지수(55.5%)의 두 배에 달했다.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회는 이미 두 개 종목에서 불공정거래 혐의를 확인하고 심리 절차에 들어갔다.
전범진 기자 forwar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