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쟁(1960~1975)은 초기에는 내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1964년 미국이 북베트남을 폭격하며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다. 미국은 남베트남의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남베트남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당시 남북을 막론하고 베트남인은 화교에게 반감이 있었다. 인구의 1%밖에 되지 않는 화교가 부의 70~80%를 차지하고 있는 데 대해 증오심이 컸다. 친자본주의 정책을 펼치는 미국에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베트남인에게 미국이 선사하려는 자유는 화교를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민족적 사고방식을 읽지 못한 미국은 명분을 잃은 채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다. 미국은 2003년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도 비슷한 과오를 저질렀다. 미국은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쫓아내면 이라크 국민이 민주주의 회복에 동참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후 이라크에선 내전이 벌어졌고 혼란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정치적 부족주의》는 ‘국가’라는 틀에 가려져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부족’적 정체성이 세계 곳곳에서 어떤 분열을 일으키고 있는지 보여준다. 저자는 국제분쟁 전문가로 《불타는 세계》 《제국의 미래》 등을 쓴 에이미 추아 예일대 로스쿨 교수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누구나 ‘부족 본능’이 있다. 부족은 개인에게 소속감과 애착을 느끼게 하는 집단을 뜻한다. 인종, 지역, 종교, 분파 등 어떤 것에든 기반을 둘 수 있다. 사람들은 이 안에서 유대감과 안정감을 느낀다. 부족 본능이 ‘소속 본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배제 본능’으로도 나타난다. 한 집단에 속하고 나면 그 집단에 단단히 고착된다. 개인적으로 얻는 것이 별로 없어도 집단의 이익을 위해 맹렬히 나선다. 집단에 속하지 못한 외부인은 무조건 징벌하려는 속성도 있다.
부족 본능은 한 국가나 한 인종 안에서도 나타난다. 저자는 미국 백인들이 두 부족으로 분열됐다고 분석한다. 한 부류는 정치적 참여도가 높고 자신을 ‘세계 시민’이라고 생각하는 도시와 연안 지역의 백인이다. 이들은 자신이 ‘부족적’인 것과는 정반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의 세계적인 사고는 고학력에 여러 나라를 다녀볼 수 있었던 엘리트 계층의 배타적인 ‘부족적 표식’이다.
다른 부류의 백인은 교육 수준이 낮고 인종주의·애국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주로 농촌과 중서부의 노동자 계급에 속한다. 엘리트 계급을 권력의 지렛대를 통제하는 소수 집단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에도 일조했다.
저자는 “부족주의를 해소하기 위해선 ‘면대면 접촉’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정 당 지지자와 특정 지역 거주자 사이에는 교류가 거의 없어 큰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한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눠야 부족적 적대가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해야만 국가를 위협하는 위기가 닥쳤을 때 서로에게 손가락질만 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진짜 해법을 찾을 수 있다.” 미국을 주요 사례로 들고 있지만 지금 이 시대의 한국 사회에도 많은 울림과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책이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