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4월16일(05:00) 자본시장의 혜안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국내 벤처캐피탈(VC)들이 지난해 대규모 흑자를 기록하며 2017년 이후 이어진 호실적을 이어갔다. 정부가 ’제2벤처붐‘을 경기 활성화를 위한 아젠다로 내세우며 모태펀드 출자를 확대하며 벤처펀드 규모가 크게 늘고, 전 세계적인 벤처 투자 열풍 속에 VC들이 투자한 스타트업(창업 초기기업)들의 가치가 높아진 영향이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으로 스타트업 업계의 구조조정이 이뤄지고 자금경색 가능성이 대두되면서 VC업계의 긴장감도 높아지고 있다.
◆"코로나19 전까지는 분위기 좋았는데.."
본지가 12월 결산법인으로 최근 사업 보고서를 발표한 12개 VC 상장사들의 실적을 집계한 결과 11개 VC가 지난해 당기순이익을 기록했다. 유일하게 적자를 낸 곳은 대성창업투자 뿐이다. 12개 상장사의 총 매출액은 2018년 약 2988억원에서 지난해 3166억원으로 소폭 상승했다. 12개 VC의 당기순이익 총합을 총 매출액으로 나눈 업계 당기 순이익률은 같은 기간 18.7%에서 29.2%로 크게 상승했다.
지난해 VC들이 전반적으로 좋은 실적을 보인 것은 ‘제2벤처붐’을 목표로 대규모 정책자금이 풀리며 벤처펀드 규모 자체가 크게 늘어난 것이 영향을 미쳤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국내 연간 벤처투자액은 2017년 2조 3803억원에서 2019년 4조 2777억원으로 2년 만에 약 80% 증가했다.
전 세계적으로도 인공지능(AI), 로보틱스, 바이오 등 이래 유망 기술로 손꼽히는 기업들을 중심으로 ‘거품’ 논란이 일 정도로 밸류(가치)가 높아지는 ‘벤처랠리’가 이어진 것도 VC들의 호실적을 이끌었다. 2018년 6개에 그쳤던 한국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스타트업)은 지난해 11개로 2배 가까이 늘었다. VC들이 투자와 상장을 이끌었던 바이오 기업들의 주가가 상승하고 배달의민족, 수아랩 등 국내 스타트업들이 높은 가치에 해외 기업에 매각되는 등 호재도 잇따랐다.
VC들의 이익은 크게 △펀드를 운용하면서 얻는 관리보수 △펀드 청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성과 보수 △보유 상장 주식 가격 변동에 따른 지분법 손익으로 나뉜다. 펀드 규모의 증가와 전 세계적 벤처랠리 속에서 VC들의 이익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가 모두 개선된 것이 높은 성과로 이어졌다는 평가다.
◆단기 여파는 '중립적'..장기 전망은 '흐림'
하지만 올해도 이 같은 흐름이 이어질지에 대해선 물음표가 붙는다. 코로나19의 전 세계적 확산 여파가 경제 위기로 번질 가능성을 우려한 연기금, 공제회, 보험사 등 민간 대형 출자자(LP)들은 올해 벤처펀드 출자에 조심스러운 분위기다. 업계 일각에선 코로나19 확산에 일부 LP들이 VC들에게 발급했던 투자확약서(LOC) 회수를 검토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실제 최근 국민연금을 비롯한 국내 주요 LP들은 자금을 위탁 운용하고 있는 VC들을 대상으로 출자 펀드의 투자 현황에 대한 대대적 리스크 점검에 나서기도 했다.
한편 정부는 한국벤처투자(모태펀드), 한국성장금융, 산업은행 등을 통해 벤처투자에 2조원이 넘는 정책 자금을 투입해 총 4조원 규모의 벤처펀드를 조성할 계획이다. 정책 자금이 앵커(핵심) 투자자로 참여하더라도 펀드가 최종 결성되기 위해선 정책자금에 준하는 수준의 민간 자금 조달이 필요하다. 정책자금은 늘었는데 민간 LP들은 출자를 꺼리면서 운용사들이 정책 자금을 유치해놓고 펀드 결성엔 실패하는 리스크가 커질 것이란 전망이다. 한 공제회 관계자는 “올해는 운용사가 얼마나 자금 확보에 성공했는지가 관건이 될 것”이라며 “운용사 간 양극화 현상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VC들의 투자 대상인 스타트업에 미치는 영향은 현재까진 중립적으로 평가된다. 지난해까지 각광 받던 ‘공유’나 ‘여행’ 관련 스타트업들이 대규모 구조조정에 들어가고 있지만 전자결제, 온라인쇼핑이나 5G, 바이오 등 소위 ‘언택트’(Untact·비대면) 업종 스타트업들은 되려 가치가 높아지는 등 코로나19의 여파가 선별적으로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민간 벤처투자 통계 플랫폼 더브이씨(The VC)와 창업투자회사전자공시시스템 등에 따르면 코로나19 여파가 본격화된 지난 3월 벤처투자 규모는 약 2200억원으로 전년 동기(2978억원)에 비해 크게 줄었다. 하지만 이 기간 중에도 새벽배송 전문 유통사 마켓컬리, 전자책 업체 리디 등은 국내외 투자자들로부터 대규모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한 대형 VC임원은 “특정 업종 쏠림 현상이 심했던 과거 벤처 위기와 달리 현재 VC들은 플랫폼 서비스, IT, 바이오 등에 포트폴리오를 분산시켰다”며 “과거 두 차례의 벤처 위기 때와 이번은 다를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VC업계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불확실성'이다. 전 세계 정부가 강력한 양적 완화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전 세계 경기가 V자 반등에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벤 버냉키 전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지난 달 말까지도 코로나19 여파에 대해 낙관적인 시각을 유지했지만 최근 "V자 반등이 힘들다"고 의견을 바꾸기도 했다.
2000년대 초반 닷컴버블 붕괴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기관투자자들은 불확실성이 높아지자 위험자산인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를 급속도로 줄인 바 있다. 과거처럼 자금 경색이 현실화할 경우 당장의 수익보다는 시장 점유율 확대를 위해 대규모 투자에 집중했던 스타트업들을 중심으로 유동성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VC 대표는 "위기 상황을 견디면서 최고의 스타트업이 탄생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견디지 못하고 사라질 것"이라며 "VC업계도 혹한기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