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과 이탈리아, 프랑스 등 대부분 유럽 국가에서 잇단 봉쇄 조치가 시행되고 있던 지난달 17일 영국 런던 번화가인 소호 지역. 영미권 축일인 ‘성 패트릭 데이’를 맞아 인근 펍과 식당 곳곳에선 축제가 벌어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가 유럽 전역에서 확산되고 있는 와중에도 사람들로 붐비는 등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지금 영국 전역은 준전시 상태를 방불케 한다. 대부분 유럽 국가에서 코로나19가 진정세를 보이지만 영국은 상황이 더 악화되고 있다. 14일(현지시간) 기준 영국의 누적 사망자는 1만2000명을 넘어섰다.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많다. 하루 신규 사망자는 1000명에 육박한다.
다른 유럽 국가들이 봉쇄 조치를 일부 완화하고 있지만 영국은 상황이 악화되면서 현 봉쇄 조치를 최소한 다음달까지 연장하겠다는 방침이다. 경제 타격도 막대하다. 영국 정부는 올해 국내총생산(GDP)이 전년 대비 12.8% 급감할 것으로 예상했다. 1709년 이후 311년 만에 최악의 감소폭이다.
미국 워싱턴대 보건계량분석평가연구소는 올여름까지 유럽에서 15만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 중 영국 사망자가 6만여 명으로, 유럽에서 가장 많을 것으로 내다봤다. 세계 최대 규모의 공공의료보건서비스를 보유하고 있고, 과학 선진국으로 불리는 영국이 직면한 현실이다.
이유가 뭘까. 가디언과 텔레그래프 등 유력 언론들은 정치인의 오판과 자만이 사태를 키웠다고 지적했다. 영국 정부는 공공의료시스템으로 충분히 코로나19에 대응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틈만 나면 아시아 국가와 달리 영국은 선진적인 보편적 의료시스템을 보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더욱이 영국 정부는 사태 초기 인구 중 대략 60%가 면역을 얻으면 바이러스 확산을 막을 수 있다는 ‘집단면역’ 논리를 폈다. 휴교령과 외출금지령 등 봉쇄 조치도 내리지 않았다. 전문가들의 잇단 경고에도 정부는 꿈쩍조차 하지 않았다. 정부는 공공장소에서 마스크 착용도 권고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강조한 것이 손 씻기였다. 그럼에도 정치인들은 병원을 방문해 악수 등 신체 접촉을 거리낌 없이 했다.
하루 사망자가 수백 명으로 불어나자 영국 정부는 뒤늦게 방침을 바꿨다. 지난달 23일에서야 봉쇄 조치를 뒤늦게 발령했다.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열흘가량 늦었다. 바이러스가 영국 전역에 퍼진 뒤였다. 진단키트 등 검사 인프라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보니 의심 증상이 있다고 신고해도 집에 머물러 있으라고만 할 뿐이다. 일선 현장에서 근무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조차 제대로 된 검사를 받지 못하고 있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외쳤던 보리스 존슨 총리 등 정치인들도 잇따라 감염됐다. 일간 가디언은 “정치인들의 변명을 우리는 더 이상 믿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영국이 직면한 현실은 지도층의 오판과 자만이 국가를 순식간에 수렁으로 빠져들게 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방역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한국도 잊지 말아야 할 대목이다. 해외 정부와 외신은 지난달 중순부터 연일 한국의 의료 및 방역 시스템을 우수 사례로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방심했다가 지난 3개월간의 노력이 순식간에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정부와 여당도 자화자찬은 상황이 종식된 후에 해도 늦지 않다. 한국의 코로나19 방역을 이젠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