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라면 사랑은 특별하다. 1년에 한 사람당 평균 74개를 먹는다. 세계 1위다. 2위인 베트남보다 20개 많다. 지난 3년간 라면회사들이 쏟아낸 신제품은 100개가 넘는다. 라면은 1960년대 귀한 음식에서 1980년대 서민들의 간편한 끼니, 2000년대 이후 진정한 의미의 기호식품이 됐다.
라면의 역사는 농심의 역사다. 잘 팔리는 라면 10개 중 6개는 농심의 라면이다. 신라면, 짜파게티, 안성탕면, 너구리가 수십 년째 10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국내 라면시장을 평정한 농심은 신라면을 내세워 세계 무대에서 ‘K푸드’의 대명사가 됐다. 올해 해외 매출이 최초로 1조원을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농심이 “우리 제품은 우리가 만든다”는 철학으로 1965년 라면을 생산한 지 55년 만이다.
1분에 600개, 연 10억 개 신라면 만드는 구미공장
농심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더 바빠졌다. 영화 ‘기생충’의 짜파구리 열풍까지 더해져 지난 2월에만 라면 판매량이 약 30% 이상 늘었다. 미국 등 해외시장에서도 비상식량으로 라면을 찾는 수요가 급증했다.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도 농심은 허둥대지 않았다. 공급 차질도 없었다.
농심은 한국과 미국 중국 등 국내외 공장에서 연간 약 47억 봉지의 라면 생산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미래 수요까지 감안해 1990년대부터 생산 능력을 차근차근 늘려놨다. 국내는 경북 구미를 포함해 총 5개 공장이 가동 중이다. 심장부는 ‘구미공장’이다. ‘세계 최고 공장’을 목표로 2001년 준공된 공장이다. 당시 1400억원이 투입됐다. 식품업계 최고 투자액이었다. 스프 제조부터 포장, 물류설비 등 전 과정이 자동화되고 체계적으로 관리되는 최첨단 공장이다. 구미공장에서는 1대의 라인에서 1분에 최대 600개의 라면을 생산할 수 있다. 이런 라인이 6개 있다. 라면 제조 부문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영국 BBC도 방송에서 구미공장을 ‘슈퍼 팩토리’로 소개한 바 있다.
구미공장은 20년간 ‘신라면 신화’를 만든 동력이 됐다. 라면의 원활한 공급은 물론 품질 문제까지 해결했다. 1986년 생산된 신라면의 누적 판매량은 약 310억 개. 2위인 안성탕면과 비교해도 두 배 수준이다.
지구를 덮은 신라면, 1970년대 수출 밑그림
농심은 눈앞의 변화만 좇기보다 멀리 보고 기술과 인프라를 준비하는 기업문화를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생산시설도 미래 수요까지 감안해 미리 준비했다. 해외 진출도 마찬가지다. 신춘호 회장은 1980년대부터 “세계 어디를 가도 신라면을 보이게 하라”고 말하며 수출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이 때문에 국내 식품회사 중 가장 먼저, 가장 공격적으로 해외에 진출했다. 라면을 처음 수출한 것은 1971년. 창업 6년 만이었다. 농심의 눈은 이후 늘 세계 무대를 향했다. 남극의 길목부터 알프스 최고봉에서까지 ‘신라면’을 팔고 있다.
농심은 국내 라면시장이 언젠가는 정체에 빠질 것으로 판단해 일찌감치 해외에 진출했다. 소고기라면을 시작으로 해외 시장을 개척한 농심은 1980년대 수출 네트워크를 본격 구축했다.
1981년 일본 도쿄에 현지 사무소를 개설했고, 1996년에는 중국 상하이에 첫 해외 공장을 세웠다. 중국 공장을 3개까지 늘린 뒤 2005년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공장을 지었다. 현재 90% 이상 가동되고 있는 미국 제1공장으로는 물량이 부족해 2021년 완공을 목표로 서부 캘리포니아 지역에 제2공장을 곧 착공한다. 호주, 베트남에도 법인을 설립하는 등 농심은 세계 100여 개국에 라면을 수출하고 있다. 하늘 위와 땅끝까지 농심은 ‘실핏줄 전략’으로 신라면을 팔았다. 스위스 최고봉 몽블랑의 등산로와 융프라우 정상 전망대, 남아메리카 칠레 최남단 마젤란해협 근처의 푼타아레나스, 스위스 마터호른과 캐나다 나이아가라 폭포 매점, 이탈리아 로마의 유엔식량농업기구 본부 면세점까지 진출했다.
해외에서의 성과는 느리지만 견고하게 ‘초격차 경쟁력’으로 이어졌다. 농심의 라면 수출액은 2004년 1억달러를 넘었고, 2015년엔 5억달러를 돌파했다. 지난해 농심은 전체 매출의 약 40%인 8억달러(약 9591억원)를 미국과 중국 등 해외에서 달성했다. 농심의 올해 해외 매출 목표는 전년보다 17% 증가한 9억5000만달러다.
“가격이 아닌 품질이 시장을 좌우한다”
라면은 가격 경쟁이 치열한 시장이다. 비슷한 형태로 수백 개의 유사 제품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싼 가격에 열광한다. 1981년 당시 2위였던 농심은 남들과 전혀 다른 전략을 썼다. 신 회장은 당시 직원들에게 “시장은 가격이 아닌 상품력이 중요하다”며 “오직 ‘최고의 제품’으로 승부해야 시장을 제패할 수 있다”고 했다.
농심을 1등 기업으로 키운 건 투자와 기술 개발이다. 1965년 첫 라면을 생산한 해에 라면연구소를 세워 연구개발(R&D) 노하우를 지금까지 쌓아오고 있다. 프리미엄 라면시장을 연 ‘신라면블랙’, 건강한 라면의 새로운 트렌드를 창출한 ‘신라면건면’ 등 내놓는 제품마다 시장의 혁신을 주도할 수 있는 이유다.
라면 외 사업군에서도 식품업의 본질에 투자해 성공을 거둔 사례가 많다. 농심의 제품엔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따라붙는다. 트럭 80대 분량의 밀가루로 수천 번 실패하다 제조해낸 국내 최초의 스낵 새우깡, 국내 최초의 쌀면과 건면 특허 기술, 국내 최초의 짜장라면 등이 수많은 도전 끝에 만들어진 결과다.
라면 신화를 잇는 새 성장동력은 물이다. 2015년 백산수 신공장을 가동하며 생수 사업에 본격 뛰어들었다. 백두산 천지에서 흘러나온 용천수를 생수로 만들기 위해 세계 최고의 설비와 기술을 도입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