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낭만주의 시대 작곡가들은 영감을 얻으려 방랑했다. 여행을 통해 얻은 감정과 ‘방랑’ 정신을 작품 곳곳에 새겼다. 피아니스트 조성진도 19세 무렵 본격적인 방랑 길에 올랐다. 서울예술고 재학 시절 더 넓은 세상을 만나기 위해 유학을 결심했고, 2012년 프랑스 파리국립고등음악원에 들어갔다. 그는 음악과 함께 당대 문화를 맘껏 배웠다. 파리 샹젤리제 극장을 원없이 드나들었다. 그렇게 쌓은 문화적 소양은 2015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의 밑거름이 됐다.
조성진이 클래식 레이블 도이치그라모폰(DG)을 통해 다음달 8일 새 음반 ‘방랑자(The Wanderer)’를 선보인다. 그의 첫 ‘콘셉트 앨범’이다. 그가 쇼팽 콩쿠르 우승 이후 DG와 함께 낸 세 장의 정규 앨범은 각 쇼팽, 드뷔시, 모차르트 등 한 작곡가의 작품들로 채웠다. 새 앨범은 ‘방랑’이라는 콘셉트로 세 작곡가의 작품을 한데 엮었다.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과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 베르크의 ‘피아노 소나타’를 담았다.
13일 서면으로 만난 조성진은 “여러 작곡가의 곡을 모은 레퍼토리 프로그램을 짠 적이 없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었다”며 “고민 끝에 ‘방랑자 환상곡’을 중심으로 곡을 골랐다”고 말했다. “방랑은 낭만주의 시대 음악가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슈베르트와 리스트, 베르크 등 낭만주의 예술가는 모두 영감을 얻기 위해 여행을 다녔습니다. 이런 공통점이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앨범에 수록된 곡들은 형식적으로도 비슷하다. 그는 “세 곡 모두 소나타 형식이지만 악장마다 연결돼 듣다 보면 한 악장처럼 들린다”며 “이 같은 형식을 활용해 하나의 콘셉트를 앨범에 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방랑자 환상곡’은 피아니스트 사이에서 연주하기 까다로운 곡으로 알려져 있다. 작곡가인 슈베르트조차 생전에 “연주하기 어려운 곡”이라고 말했다. “악장마다 성격이 달라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듣는 사람에게 이 곡이 기술적으로 연주하기 어렵다는 걸 들키지 않고 음악적으로 다가가는 게 가장 중요하죠. 기술적으로 편안하게 들리도록 연주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방랑자 환상곡’은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서 피아니스트 마우리치오 폴리니,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등 대가의 연주로 유명하다. 조성진의 연주가 묻힐 수도 있다. 앞선 연주자들과의 차별점을 물었다. “일부러 특별하게 연주하려고 하면 부자연스럽게 치게 됩니다.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주하는 게 가장 나다운 연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녹음할 때도 자연스러움을 앨범에 녹이려 했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6월 독일 베를린에서 녹음 작업을 할 때 스튜디오 리코딩을 마친 뒤 관객 20~30명을 따로 모아 연주회처럼 방랑자 환상곡을 연주했습니다. 이때 연주한 곡을 앨범에 담았습니다. 베르크의 소나타도 관객 앞에서 연주한 걸 실었습니다.”
조성진의 삶은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난 이후 방랑의 연속이다. 쇼팽 콩쿠르 우승 이후에는 본격적인 콘서트 피아니스트의 삶을 시작하며 방랑의 시간이 더 많아졌다. “처음 몇 년간은 제가 정착할 ‘집’이 파리인지 한국인지 헷갈렸습니다. 몇 개월 간격으로 머물다 떠나곤 했고 이후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삶을 살다 보니 결국 ‘내가 있는 곳이 집이구나’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방랑에 따른 외로움을 묻는 말에는 “외동아들이다 보니 어렸을 때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며 “성인이 된 뒤 협연자와 다른 예술가들을 만나는 시간이 많아져 오히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세계를 누비던 그의 방랑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잠시 멈췄다. 그래도 공연을 멈추진 않았다. 그는 지난달 28일 독일 베를린에서 온라인 생중계 공연을 했다. “음악가 대부분이 ‘워커홀릭’인 것 같습니다. 온라인을 통한 피아노 생중계 공연에도 많은 피아니스트가 동참했습니다. 저도 쉬지 말고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갑자기 늘어난 시간은 “음악과 영화를 보며 소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코로나19 사태로 음악과 무대의 중요성을 더 느끼게 됐다”며 “일상 생활을 하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조성진은 음악적으로도 방랑했다. 지난해 9월 열린 경남 통영 페스티벌에서 지휘봉을 잡은 것이다. 그는 “진지하게 지휘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아직 해본 적이 없다”며 “다만 제안이 들어오면 2~3년 안에 피아노 협주곡처럼 익숙한 곡으로 다시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보고 싶다”고 했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