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어적으로 투자할 사이클은 끝났다.”
하워드 마크스 오크트리캐피털 회장이 최근 고객들에게 보낸 ‘투자 메모’의 핵심 내용이다. 마크스 회장의 메모는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필독 콘텐츠 중 하나다. 워런 버핏 벅셔해서웨이 회장은 “이메일 수신함에서 마크스의 메모를 발견하면 가장 먼저 열어본다”며 “그때마다 무언가를 배우게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마크스 회장이 월가에서 ‘전설적 투자자’로 불리는 이유다. 그는 지난달에만 네 개의 메모를 고객들에게 보냈다. 작년 한 해에 다섯 개를 썼던 것과 비교하면 이례적인 다작(多作)이다. 스스로도 ‘신기록’이라고 했을 정도다. 그만큼 최근 시장에 대해 할 말이 많다는 뜻이다. 마크스 회장은 대표적인 ‘시장 역행 투자자(contrarian)’이자 부실채권 투자 전문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으로 시장 변동성이 커진 지금, 그의 목소리에 월가가 바짝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최근 메모에서 “더 이상 (투자에) 방어적일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12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도 마크스 회장은 “바닥을 기다리지 말고 조금씩 자산을 사들일 때”라고 주장했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시장 사이클의 상승기가 끝난 것 같습니다.
“최근 몇 년간 세상은 굉장히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가격은 높은데 사람들은 계속해서 위험 자산을 사들였죠. 아무도 상승기를 끝낼 촉매제가 무엇이 될지 모르는 상태로요.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촉매제(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해 알고 있고, 위험 감수 성향이 줄어들었죠. 우리(오크트리캐피털)는 지난 1~2년 동안 (투자에) 상당히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방어적일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좋은 자산을 할인된 가격에 사들이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좋은 투자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코로나19의 영향이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으로 보는 건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번 위기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비슷합니다. 그 당시에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라는 바이러스가 퍼져 있었죠. 전 세계와 기업들에 막대한 악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두 위기가 비슷합니다. 사실 이번 위기는 더 무시무시하죠. 당시는 금융시스템의 문제였지만 지금은 삶과 죽음의 문제니까요.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도 전례없는 수준입니다. 4월 첫 주 미국의 실업수당 청구 건수가 661만 건이었어요. 역사적으로 최악이었던 69만5000건(1982년 2차 오일쇼크 당시)에 비해 10배 가까이나 높은 수치죠. 모건스탠리는 미국의 2분기 국내총생산(GDP)이 34% 급감할 것으로 전망했어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공격적으로 투자해야 한다는 이유는 뭔가요.
“꼭 투자를 공격적으로 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렇게 방어적일 필요는 없다는 뜻이죠. 투자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식을 사느냐, 채권을 사느냐’가 아닙니다. 공격과 방어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는 것입니다. 작년 말 시장 사이클이 정점에 있던 때에는 앞으로 시장이 나빠질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았습니다. 우리가 매우 방어적이었던 이유죠. (가격이 하락한) 지금은 나빠질 가능성과 좋아질 가능성이 함께 존재합니다. 시장이 올라가면 지금 투자한 것에 대해 즐거워하면 되고, 만약 내려가면 더 사들이면 됩니다. 가지고 있는 현금을 지금 모두 투자하라는 것은 틀린 얘기지만, 현금을 전혀 쓰지 말라고 하는 것도 맞지 않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바닥이 어디인지 알 수 없지 않습니까.
“바닥을 기다리겠다는 것은 비이성적인 말입니다. 왜냐하면 어디가 바닥인지는 늘 지나고 나서야 알 수 있기 때문이죠. ‘완벽함은 좋음의 적’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투자자들은 한 번의 완벽한 매수보다 여러 번의 좋은 매수를 해야 합니다. 투자에서 돈을 잃는 것만이 리스크가 아닙니다. 돈 벌 기회를 놓치는 것도 리스크죠.”
▷한국의 개인 투자자들은 지난달 시장이 폭락하는 상황에서 삼성전자 주식을 대거 사들였습니다. 블루칩을 싼 가격에 살 일생의 기회라고 여기면서요.
“한국 주식시장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모르지만, 전반적으로 그들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바닥을 기다리기보다는 가치에 비해 주가가 싸다고 생각하면 조금씩 사는 게 좋습니다. 우리 모두 삼성전자가 훌륭한 회사라는 것을 알고 있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라는 데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마트에서 좋은 물건을 세일할 때 더 많이 사듯이, 주가가 쌀 때 사들여야죠. 하지만 빚을 내서 투자하는 건 매우 위험합니다.”
▷지금 미국 주식은 쌉니까.
“미국 주식은 그렇게 많이 빠지지 않았어요. 고점 대비 20% 정도 떨어졌는데, 큰 위기 때는 40~50%까지 폭락하는 경향이 있죠. 지난 고점에서 S&P500 종목들의 주가수익비율(PER)은 19배였습니다. 지금은 15~16배인데,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평균 수준이죠. 하지만 이 PER은 작년 실적 기준입니다. 올해 기업들의 실적은 곤두박질칠 가능성이 큽니다. 제가 최근에 접한 실적 전망을 기초로 하면 올해 말 실적 기준 S&P500 종목의 PER은 24배 수준입니다. 엄청나게 높은 거죠. 내년에는 기업들의 실적이 V자로 반등할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기대합니다. 하지만 이는 매우 낙관적인 가정이죠. 요약하자면 현재 미국 주식의 가격은 합리적인 수준이지만, 아주 싸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더 떨어질 수 있다는 뜻이군요.
“시장이 직선으로 상승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2000년 닷컴버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S&P500 지수는 폭락 후 두 번의 랠리와 두 번의 더 큰 폭락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몇 개월 안에 시장이 지금보다 훨씬 더 크게 하락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도 좋은 가격에 좋은 자산을 발견하면 사들이고 있습니다. 앞서 말한 이유에서죠.”
▷당신은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준비할 수는 있다’고 강조해왔습니다. 오크트리는 지금 준비돼 있나요.
“완벽하게 준비돼 있다고 말할 순 없어요. 그렇게 말하려면 투자 없이 100% 현금을 가지고 있어야 하죠. 하지만 투자회사가 아예 투자를 안 할 수는 없잖아요.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우리의 주요 투자 자산인 부실채권의 경우 보유액이 2010년 250억달러에서 현재 110억달러로 줄었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투자 자산을 늘리던 지난 5년간 우리는 거의 늘리지 않았죠. 우리는 펀드 자금을 모집 중입니다. 지금 같은 때 현금을 가지고 투자할 수 있다는 건 매우 좋은 일입니다. 지난달 금융시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었지만 우리는 사정이 상대적으로 좋았습니다. 우량기업의 선순위 채권이 할인된 가격에 쏟아져 나왔고 대거 사들일 수 있었죠.”
▷한국 기관투자가들은 지난 몇 년간 미국 중견기업 채권에 많이 투자했습니다. 이런 채권들은 안전할까요.
“버핏은 ‘썰물이 빠져나가야 누가 알몸으로 수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누가 올바른 판단으로 좋은 대출을 했는지는 앞으로 2년 안에 알 수 있을 겁니다. 그 기간을 버틸 수 있는 회사에 대출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너무 많은 돈을 빌렸거나 위기를 이겨내지 못하는 회사에 대출했다면 문제가 되겠죠.”
▷이번 위기로 수혜를 볼 산업은 어디일까요.
“수혜를 볼 산업은 많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줌(화상회의 솔루션 회사)과 넷플릭스(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회사) 정도일까요. 더 중요한 질문은 ‘앞으로 약 2년 동안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입니다. 2년 후면 경기가 되살아날 텐데 그때까지 버티는 회사가 어디일지를 판단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최근 몇년간 많은 대출이 채권자 보호장치가 약한 ‘커버넌트 라이트(covenant-lite)’로 이뤄졌습니다. 파산 시점은 지연되겠지만 결국 파산하면 문제가 더 심각할텐데요.
“맞아요. 커버넌트(채권자 보호조항)가 있으면 어떤 시점에 채권자가 주도권을 잡고 출혈을 멈출 수 있죠. 하지만 커버넌트가 없으면 원리금을 갚지 못하는 시점에 가서야 파산을 하게 되고 그 때는 채권자가 건질 수 있는 돈이 훨씬 적을 겁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선순위 대출의 비중이 높죠. 과거에는 선순위 밑에 중순위, 후순위 등이 버퍼 역할을 했는데 지금은 모두가 선순위를 들고 있으니 채권자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더 어려워졌습니다.”
▷기업의 유동성 위기가 시스템 리스크로 번질 수도 있다고 봅니까.
“한편으론 걱정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우리에게 좋은 기회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32년간 부실채권에 투자해왔습니다. 지금 시스템적인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은행보다 비은행권 투자자들이 기업 채권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은행이 파산하면 큰 문제지만, 일부 비은행 대출자가 파산한다고 경제 전체가 망가지지는 않습니다.”
■ 하워드 마크스는
오크트리캐피털 세계 1위 부실채권 운용사로 키워
세계 최대 부실채권 전문 운용사인 오크트리캐피털의 공동 창업자이자 회장이다. 지난해 말 기준 오크트리캐피털이 운용하는 자산 규모(AUM)는 1250억달러(약 150조원)에 달한다. 마크스 회장은 1946년생으로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서 학사과정을 마친 뒤 시카고대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받았다. 씨티코프에 입사해 주식 애널리스트로 일했으며, TCW그룹으로 옮긴 뒤 하이일드(고수익·고위험) 채권과 부실채권 투자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공동창업자인 브루스 카시와 함께 1988년 TCW에서 월스트리트 최초로 부실채권 투자펀드를 조성하기도 했다. 1995년 오크트리캐피털을 설립하며 독립했다. 마크스 회장은 시장에 대한 시각과 투자 전략 등을 담은 ‘메모’로 월스트리트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힌다. 2011년 쓴 책 《투자에 대한 생각(The Most Important Thing)》과 2018년 내놓은 《투자와 마켓사이클의 법칙(Mastering the Market Cycle)》은 투자업계의 필독서로 통한다. 지난해 캐나다 자산운용사인 브룩필드가 오크트리캐피털 지분 62%를 인수했다. 마크스 회장과 파트너들이 나머지 38%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 약력
△1946년 미국 뉴욕시 출생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졸업
△시카고대 경영대학원 석사
△1969년 씨티코프 입사
△1985년 TCW그룹 입사
△1995년 오크트리캐피털 설립(현재 공동 회장)
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