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코로나 역설들

입력 2020-04-12 18:52
수정 2020-04-13 00:14
‘작은 미생물이 지구를 뒤집고 있다. 그것은 모든 것에 의문을 던지고 기존의 규칙들을 바꾼다. 다르게, 새롭게…. 서방 강국들이 해내지 못한 것을 이 조그만 미생물이 해냈다.’ 코로나19 발병 이후 아프리카의 한 시인이 썼다는 글의 일부다. 출처가 불분명한데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며 이를 전파하고 있다.

코로나19는 예기치 못한 대재앙이지만, 9년간 내전에 휘말린 시리아와 리비아의 총성을 멎게 했다. 5년간 10만 명 넘게 사망한 예멘의 휴전도 앞당겼다. 예멘 내전에 개입했던 사우디아라비아는 휴전을 선언하면서 예멘에 5억2500만달러(약 6300억원)를 지원하기로 했다.

이 ‘작은 미생물’은 지구촌의 강력범죄도 줄였다. 치안이 나쁘기로 유명한 엘살바도르의 살인율은 절반 이하로 내려갔고, 아르헨티나의 강도 건수는 90% 급감했다. 미국 시카고의 마약 범죄율 또한 하락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악명 높은 갱단은 싸움을 멈추고 주민들의 식량 배급을 돕고 있다.

감염병의 진원지이자 ‘세계의 굴뚝’인 중국에서는 석탄 소비가 줄어 공기가 맑아졌다. 미국 연구팀은 “중국에서 코로나19 사망자가 3300여 명 발생하는 동안 대기오염으로 인한 사망자가 1만2000여 명 줄었다”며 이를 ‘건강 이득(health benefits)’이라고 표현했다. 한국의 초미세먼지 오염도 역시 지난달 기준으로 43% 개선됐다.

코로나19 사태로 되레 호황을 누리는 업체들도 있다. 게임을 질병으로 여기던 세계보건기구(WHO)가 ‘사회적 거리두기’ 방안으로 게임을 권장하면서 관련 산업이 급성장하고 있다. WHO가 ‘팬데믹(대유행)’을 선언한 지난달 11일 이후 영국 호주 뉴질랜드에서 콘돔 등 성인용품 판매량이 세 배 늘었다.

코로나19는 정치·외교 지형까지 바꾸고 있다.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예비선거에 우편투표가 등장했다. 한국 총선의 사전투표율은 역대 최고(26.69%)를 기록했다. 여야 모두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지만 무엇보다 코로나19로 인한 분산투표 효과가 컸을 것이다.

과거사 갈등을 겪는 한국과 일본이 전세기를 공동으로 빌려 카메룬의 자국민을 귀국시킨 사례도 나왔다. 필리핀과 케냐, 마다가스카르에 있던 일본인들은 최근 한국이 마련한 전세기에 ‘합승’해 무사 귀환했다. ‘인류 공동의 적’인 작은 미생물 때문에 일어난 역설의 단면들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