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세상에 흩어진 예언의 조각들을 종종 발견한다. ‘콘텐츠’라는 형태 속에서 말이다.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는 과학 분야의 예언서와 같았다. 작품에서 신기하게만 봤던 로봇과 우주 개발 경쟁은 현실이 됐다. 최근엔 더 놀라운 예언의 조각들과 마주쳤다. 2011년 개봉한 영화 ‘컨테이젼’은 9년이 흘러 전 세계에서 큰 화제가 되고 있다. 미리 엿보기라도 한 것처럼 지금의 상황을 정확히 예측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박쥐로부터 생겨난 전염병이 확산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바이러스는 순식간에 퍼지고 많은 사람이 죽음을 맞이한다.
더 날카로운 경고도 있다.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넷플릭스는 지난 1월 22일 ‘판데믹: 인플루엔자와의 전쟁’이란 제목의 6회짜리 다큐멘터리를 공개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발생하기 수개월 전 제작된 것이다. 다큐멘터리에서 데니스 캐럴 미국 국제개발처 신종위협 부서장은 말한다. “신종 바이러스가 갑자기 나타나 전 세계에 퍼질 거예요. 중국은 주의해야 할 곳 중 하나입니다.”
사람들의 상상력을 담은 콘텐츠는 많은 것을 미리 알려준다. 각 작품에 숨겨진 조각들을 하나씩 맞춰보면, 그 예지력에 놀랄 따름이다. 이 조각들을 무엇이라 정의해야 할까.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떠올리며 펼쳐놓은 생각의 파편일까. 혹은 정말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남긴 경고의 메시지일까.
둘 다 정답은 아닌 것 같다. 콘텐츠는 인류가 생존과 문명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자 결과물이다. 미래에 대한 놀라운 예언은 사유가 만든 씨앗인 셈이다. 그래서 이런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왠지 안심이 된다. 우리 스스로를 위해 작게 그려놓은 새로운 길이 어렴풋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 길을 가는 것이 쉽진 않다. 하지만 사유를 축적한 시간은 통행권이 되어 준다. 콘텐츠엔 그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과거에서 얻은 깨달음, 현재의 불안, 미래에 대한 고뇌가 있다.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는 과거의 기록이자 미래를 향한 메시지다.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흑사병의 시대. 거대한 공포에 짓눌려 있던 사람들은 점차 서로를 이해하고 연대한다. 1947년 출간된 이 소설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주요 서점의 종합 베스트셀러 10위권에 올랐다. 위기가 찾아오자 사람들은 그동안 인류가 쌓아온 시간을 다시 들춰보고 있다.
축적의 시간을 경유하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인류는 비극적 상황에서도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유토피아를 꿈꿔 온 것이 아닐까. 코로나19가 확산되자 사회는 인류 전체를 위한 담론을 쏟아내고 있다. ‘바이러스’라는 공통의 숙제가 주어지자 백신 개발 등 해결 방안은 물론이고 코로나19 이후 나타날 변화에 대해 곳곳에서 토론을 하고 있다. 비극 속에서 피어난 희망의 증표다.
문득 프랑스 파리에서 문화예술이 찬란하게 꽃핀 시기인 ‘벨 에포크(belle epoque·아름다운 시대)’가 떠오른다.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이 끝난 1871년부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1914년까지의 기간을 이른다. 직전까지만 해도 파리는 초토화된 상태였다. 프랑스 혁명부터 파리 코뮌까지 80여 년간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며 파리 곳곳은 폐허가 됐고 경제도 무너져 내렸다. 어둠이 그만큼 길고 깊었기 때문일까. 이후 파리에는 클로드 모네, 에두아르 마네, 폴 세잔 등 인상파 화가를 비롯해 위대한 예술가들이 몰려들었다. 프랑스 역사학자 메리 매콜리프가 쓴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에는 인상파 화가들에 대한 일화가 나온다. 이들은 어스름이 내리면 하나둘씩 카페에 모여들었다. 모네는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가 나눈 이야기보다 더 흥미진진한 것은 없었다. 줄곧 의견들이 부딪쳤고, 그런 다음엔 항상 새로운 목표 의식과 명료해진 머리를 갖고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지금 끝을 알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을 걷고 있다. 하지만 다행히 축적의 시간이 담긴 조각들을 두 손 가득 움켜쥐고 있다. 덕분에 목표는 더욱 분명해지고, 머리는 또렷해지고 있다. 어둠이 끝나고 눈부신 빛이 다시 비추는 날, 새로운 길이 펼쳐지기를.<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margin:25px 0; border:1px solid #c3c3c3" />우디 앨런 감독이 그린 '벨 에포크'
“세상에, 정말 아름다워요. 꿈만 같아요. 그림에서만 보던 벨 에포크!”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2011)에서 파블로 피카소의 연인 아드리아나(마리옹 코티아르 분)는 ‘벨 에포크(belle epoque·아름다운 시대)’를 동경한다. 아드리아나가 살고 있는 1920년대 프랑스 파리에도 피카소뿐 아니라 살바도르 달리,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 훌륭한 예술가가 많다. 하지만 그는 유독 19세기 말 벨 에포크의 예술가들을 흠모한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처럼 벨 에포크의 파리가 눈앞에 펼쳐진다. 그는 1920년대로 돌아가지 않고 과거에 머무르려 한다.
프랑스인들에게 벨 에포크는 그만큼 아름답고 위대한 시기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술가들의 과감한 시도 덕분이었다.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은 기성 화단의 조롱에도 새로운 화법을 선보였다. 드뷔시는 바그너로 대표되는 후기 낭만파 음악에 용감히 도전장을 내밀었다.
영화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우주는 우리의 위치를 묻죠. 예술가의 일은 절망에 굴복하는 게 아니라 존재의 허망함에 치료약을 주는 것이에요.” 암울한 코로나 시대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절망에 주저앉기보다 더욱 앞으로 나아가려는 예술가가 많다. 우리만의 벨 에포크를 기대하는 이유다.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