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은 까막눈이었다. 한평생 죽도록 고생하며 성실하게 살았다. 비록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을지라도 말씀 한번 허투루 한 적이 없었다. 이웃과 함께, 이웃과 더불어,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이 남달랐다. 동네 주민들은 그런 우리 부모님을 항상 깍듯이 대했다.
아버지는 평소 과묵했다. 매사에 빈틈이 없었다. 논일과 밭일에다 석축(石築)은 물론이고, 볏짚으로 이엉과 용마루며 멍석을 엮기까지 못 하는 일이 없었다. 성품이 곧고 찬찬했다. 일솜씨가 정교해 세인을 탄복하게 했다. 이 시대에 살았더라면 어떤 분야에서든 당대 최고의 명인(名人)이나 명장(名匠)으로 명성을 드날렸을 것이다.
어머니 또한 말씀을 아끼는 편이었지만, 일단 말문을 열었다 하면 막힘이 없었다. 문맹이면서도 청산유수 달변이었다. 속담과 수수께끼에 이르기까지 사통팔달이었다. 평범하고 흔하디흔한 표현일지언정 꼭 필요한 어휘를 적재적소에 정확히 꽂아 넣는, 그 거침없는 언변이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어머니께서 살아생전 즐겨 썼던 말씀을 더듬어보면 ‘새끼 많은 소 멍에 벗을 날 없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 있다’ ‘참을 인(忍) 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 했으니 아무리 어려워도 끝까지 참아라’ ‘맞은 사람은 두 다리 뻗고 편히 자지만 때린 사람은 팔다리 쪼그리고 새우잠 잔다’ ‘죄는 지은 데로 가고 공은 닦은 데로 간다’ ‘이웃과는 소 한 마리 가지고도 다투지 마라’ ‘형제간에는 콩 한 톨도 나눠 먹어라’ ‘달밤에 비단옷 입고 나서봤자 알아주는 사람 없다’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 된다’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특히 어머니께서는 종종 “명석한 사람은 됫글 배워 말글로 풀고 말글 배워 섬글로 풀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섬글 배워 말글로도 못 풀고 말글 배워 됫글로도 못 푼다. 바보와 숙맥은 손에 쥐여줘도 뭐가 뭔지 모르는 법”이라고 말씀하셨다.
되(升)와 말(斗)과 섬()은 곡식, 가루, 액체 따위를 담아 분량을 헤아리는 데 쓰는 도구 또는 분량의 단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열 되가 한 말이고, 열 말이 한 섬이다. 어머니께서 말씀한 됫글이란 되로 담을 만큼의 글이고, 말글이란 그 열 배인 말로 담을 만큼의 글이며, 섬글이란 다시 말글의 열 배인 섬으로 담을 만큼의 글을 뜻한다. 하찮은 배움이라도 그걸 십분 활용해 학식과 능력을 열 배 이상 확대 재생산하라는 가르침이었다. 이는 됫글조차 배우지 못한 어머니가 섬글 이상으로 풀어낸 교육철학이라 하겠다. 아버지는 68세, 어머니는 58세에 돌아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