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핀란드식 위기대응

입력 2020-04-07 18:25
수정 2020-04-08 00:23
코로나 쇼크 와중에 벌어진 ‘마스크 대란’은 한국 사회의 위험 대비 수준을 반성하게 했다. 마스크 공급에 취약점이 드러나면서 긴 구매행렬이 이어졌고, 정부는 정부대로 연일 허둥댔다. 며칠 전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의 코로나발(發) 식량위기 경고에 또 한 번 가슴을 쓸어내린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팬데믹같은 ‘블랙 스완’에 대한 대비만이 아니다. 어느덧 현실화해 버린 북핵의 가공할 위협에 대해서도 태연자약하다.

세계 각국이 방역·의료 물자 조달에 비상이 걸린 와중에도 북유럽의 강소국 핀란드에는 마스크 대란이 아예 없어서 관심거리다. 늘 비상상황에 대비해 준비해온 비축품이 위기에 빛을 낸 것이다. 핀란드의 비상물자에는 마스크를 비롯한 의료 물자, 석유, 곡물, 농업 기자재, 탄약 재료 등이 포함돼 있다고 외신이 전했다. 비상물자답게 보관 물량과 산재한 저장 창고 위치도 모두 국가 기밀이다. 국가 차원에서 철저하게 준비를 했으니 사재기가 없는 게 자연스럽다.

핀란드 특유의 이런 준비성을 ‘프레퍼(prepper) 정신’이라고 한다. 미리미리 큰 재난에 대비하는 습성이다. 여기에는 이 나라의 아프고 슬픈 역사가 있다. 가깝게는 2차 세계대전 때인 1939년 11월 소련의 침공으로 영토의 10%를 빼앗겼다. 그후 전쟁 대비는 곧 생존의 문제였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수시로 반복된 이웃 스웨덴의 침공과 지배였다. 지정학적으로도 북해에 닿아 있는 이웃 스웨덴·러시아와 달리 발트해를 통해서만 해상 물품을 보급받을 수 있다. 유럽의 전문가들은 핀란드에 대해 “3차 세계대전 같은 대재앙에 대해 준비해온 나라”라는 평가를 내린다.

핀란드에도 코로나 환자는 나왔다. 인구 비율로 보면 적은 숫자가 아니다. 하지만 대응 과정이 차분하다.

핀란드의 프레퍼 정신이라고 해서 유별날 것도 없다. ‘미리미리’ 재난에 잘 대비하자는 것일 테고, 위기 때야말로 당장 생존에 필수적인 기본 품목이 더 중요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기본부터 충실하기’인 셈이다.

4차 산업혁명을 도모해온 ‘하이테크(hightech) 시대’에 맞은 코로나 쇼크가 장기화하고 있다. 방역, 식량확보 같은 ‘로테크(lowtech)’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하는 계기가 될까. 기본에 충실한 핀란드의 준비정신은 ‘로테크, 하이콘셉트(high-concept)’라고 해도 되겠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