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중엽 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를 휩쓴 흑사병은 참혹했지만 세상을 바꾸는 동력이 됐다. 간절한 기도도 소용없고, 성직자가 더 많이 죽어 나가자 ‘신’보다 ‘인간’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이런 각성은 르네상스로 이어졌다. 노동력 품귀는 장원 해체와 농노의 도시·상공업 진출을 불러 산업혁명의 단초가 됐다.
한창 진행 중인 ‘코로나 쇼크’도 거대한 변화를 부를 개연성이 높다. 재미와 쾌락에 익숙한 시대에 던져진 ‘죽느냐 사느냐’라는 낯선 존재론적 고민은 사람들에게 삶의 태도를 바꿀 것을 강제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최근 “유권자들이 선출한 카리스마 있고 계산적인 지도자보다 자기 분야 전문가들이 진정한 영웅으로 떠올랐다”고 진단한 대목은 흥미롭다.
WSJ가 꼽은 영웅은 한국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 미국 앤서니 파우치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소장, 영국 제니 해리스 부(副)최고의료책임자, 케냐 무타히 카그웨 보건장관 등이다. 특히 정 본부장이 주목받았다. “솔직한 발언, 정보에 입각한 분석, 침착함을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신뢰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국민들이 대통령과 총리 발언보다 매일 오후 2시 동그란 안경, 노란 점퍼 차림의 정 본부장 브리핑을 주시한다는 점에서 정확한 진단이다.
이에 반비례해 세계 각국의 ‘스트롱맨’ 지도자들은 위기의 시간을 맞고 있다. ‘시황제’로 불리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미숙한 대응, 불투명한 정보 공개 및 언론 통제로 권력 기반에 균열이 생겼다. 사태 초기에 의사 리원량의 경고를 무시해 자초한 결과다. 도쿄올림픽을 의식해 방역에 소극적이었던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청정 일본’ 이미지를 추락시켰다. 강력한 정치적 후견자였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로부터 ‘거짓말쟁이’로 비난받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막대한 지원금을 뿌린 탓인지 지지율은 상승세지만 확진자 폭증으로 재선을 장담하기 어렵게 됐다.
스트롱맨의 위기와 전문가의 부상은 ‘탈진실’ 시대 ‘팩트(사실) 갈구’에 대한 방증이다. 코로나 쇼크로 ‘사실과 과학’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면 그나마 ‘위장된 축복’이 될 것이다. 경제전문가를 배반한 소득주도 성장, 에너지전문가 조언에 귀 닫은 탈원전, 군사·외교전문가를 무시한 북핵 해법을 재점검하는 계기가 될 때라야 감내할 만한 고통이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