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주방기기 처분업체가 모여 있는 서울 황학동 주방거리. 이곳에 있는 폐업 지원업체 H사는 때아닌 특수를 누리고 있다. 최근 들어오는 상담 건수가 평소의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사무실에는 연신 전화벨이 울려댔다.
이 업체 대표는 31일 “한 달 평균 50건 정도의 폐업 관련 상담을 하는데 2월부터는 100~150건 정도로 늘었다”고 말했다. 폐업 대상은 대부분 자영업자가 운영하는 점포라고 했다. 그는 “오늘도 경기 용인 등으로 세 팀이 철거 작업을 나갔다”며 “직원 5명으로는 밀려드는 일을 감당할 수 없어 따로 인부를 고용해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폐업 철거업체 사장은 “나홀로 잘나가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불경기와 최저임금 인상을 다 견뎌온 가게들도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한파는 감당하기 어려워한다”고 전했다. 폐업을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자영업자도 적지 않다는 설명이다. 수백만원에 달하는 철거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는 “직접 인테리어한 곳을 폐업 처리하러 간 적도 있다”며 “문 닫는 사장님 사연이 하도 딱해 손잡고 같이 울기도 했다”고 고개를 저었다.
일명 ‘하이에나’로 불리는 청산 관련 인력업계도 호황이다. 설비를 뜯어내 철거하고 업소용 냉장고 같은 대형 물건을 운반해야 하는 만큼 여러 명의 인력이 필요하다. 인부 일당은 25만원까지 치솟았다. “요즘 황학동에서 일거리가 있는 곳은 청산·철거업체뿐”(주방용품 판매점 K사 대표)이라는 자조 섞인 얘기도 나온다.
황학동 주방거리는 어귀부터 불황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점포 앞마다 업소용 싱크대와 냉장고, 의자 등이 작은 언덕처럼 쌓였다. 한때 자영업자들의 생계를 책임지던 소중한 물건들이지만 코로나19 불황의 직격탄을 맞은 식당 카페 등이 줄줄이 폐업하면서 이곳에 매물로 나왔다.
손님 발길은 뚝 끊겼다. 대형 식기세척기와 각종 그릇 등 폐업 처분한 물건을 실은 트럭들이 간간이 들고날 뿐이었다. 주방거리의 최대 성수기로 통하는 3월이지만 곳곳에 문을 닫은 상점도 보였다.
이곳에서 중고 주방기기를 판매하는 유일주방 대표는 “외환위기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폐업했으니 주방기기를 철거해 달라는 점포는 (코로나19 사태 전보다) 두 배 이상 늘었는데 개업하겠다는 이는 없다”며 “문 닫은 음식점에서 나온 물건이 쏟아져 들어와 창고가 부족할 정도”라고 했다.<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margin:25px 0; border:1px solid #c3c3c3" />"외환위기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폐업 식당서 나온 물건 놓을 곳도 없어"
개업하겠다는 사람 사라져…자영업 생태계 무너졌다"
황학동 주방거리는 1980년대 서울 중구 황학동 중앙시장과 청계천 사이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이후 국내 외식업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상점 450여 개가 모인 전국 최대 규모의 주방용품 시장으로 자리잡았다. 주로 폐업 점포에서 수거한 각종 주방용품을 손본 뒤 개업하려는 소상공인에게 되파는 만큼 자영업 경기를 가늠할 수 있는 바로미터로 통한다.
주방설비 주문 제작업체인 은성주방설비는 주방거리 초입에 자리잡아 소비자들이 먼저 찾는 가게지만 31일 오후 늦게까지 단 한 명의 손님도 받지 못했다. 이 업체의 유두수 부장은 “사실상 두 달째 개점휴업 상태”라고 말했다. 그는 “주방거리에 들어온 지 20년 넘었는데 이렇게 지독한 불황은 처음”이라고 했다.
황학시장의 성수기는 2~3월로 이맘때면 중고 설비와 주방용품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적이곤 했다. 하지만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모든 게 멈춰버렸다. 한 주방설비 업체 대표는 “작년 이맘때와 비교해 매출이 10분의 1 이하로 뚝 떨어졌다”며 “직원 네 명의 월급이 두세 달 밀리고 임차료도 내기 어려운 형편”이라고 하소연했다. 이어 “사업을 접는 점포 가운데는 밀린 월급과 임차료를 해결하지 못해 사장이 야반도주하는 사례까지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이곳에선 속칭 ‘나까마’로 불리는 매입업자도 생태계의 한 축을 차지한다. 트럭을 몰고 다니며 폐업한 현장에서 물건을 매입해 시장에 다시 넘긴다. 오교민 보람종합주방 대표는 “인건비와 경비를 들여 물건을 수집해 파는데 제값을 못 받으니 인건비조차 건지기 어렵다”며 “외환위기 때도, 메르스 때도 어떻게든 먹고 살았는데 지금이 최악”이라고 말했다.
물건값은 뚝뚝 떨어지고 있다. 원래 5만원에 매입했던 한 주방용품에는 3만원의 가격표가 붙었다. 현금을 내면 2만원에도 거래가 가능하다고 했다. 한 중고업체 직원은 “요즘 가격은 의미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5만원이어도 안 팔리고, 1만원이어도 안 팔리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다 보니 고물상에 바로 헐값에 넘겨버리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 중고용품 매입을 함께하는 후니네 종합주방 관계자는 “주방용품을 사달라는 폐업 자영업자들의 전화만 빗발쳐 매입 전화는 아예 안 받는다”고 했다.
폐업과 창업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국내 자영업 생태계의 선순환 구조가 깨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코로나19 사태가 본격화한 2월부터 3월 25일까지 노란우산 프로그램을 통해 공제금을 지급받은 건수는 총 1만4632건으로 집계됐다. 전년 동기(1만667건)보다 37.2% 늘었다. 노란우산공제는 소기업, 소상공인 등 자영업자가 폐업이나 부도 등으로 생계위협에 처하면 공제금을 지급해 사업 재기와 생활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공적 공제 상품이다.
민경진/김정은 기자 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