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대재앙의 공포로 변환 중이다. 미증유의 사태라지만, 전염병은 수십만 년 전부터 인류와 ‘동반성장(?)’했다. 기원전 430년. 아테네에는 역병이 돌아 군인과 민간인의 4분의 1이 죽었고, 스파르타와의 싸움에서 패배했다. 로마제국은 전염병이 만연해 붕괴의 길로 들어섰다. 1347년부터 시작된 페스트로 유럽은 6년 동안 인구의 3분의 1인 2000만~3000만 명이 죽었다. 마야문명은 1521년 스페인의 코르테스가 침공했을 때 이미 30만 명 가운데 15만 명이 천연두로 사망했다. 아메리카 인디언도 초기 개척시대에 95%가 전염병으로 죽었다. 근대에 들어오면 콜레라 때문에 대영제국 안에서 1817~1865년에만 1000만~1500만 명이 죽었다.
우리도 16세기 중반에 역병이 크게 돌았고, 이때 허준이 《동의보감》을 썼다. 영조 때(1749년)는 전염병으로 전체의 13분의 1 정도인 50만~60만 명이 죽었으며, 정조 때(1799년)도 마찬가지였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번진 콜레라는 1년 만에 조선에 들어와 1822년에는 대량 죽음과 대재앙을 일으켰다. 조선시대에는 1000만 명 정도가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추정한다.
전염병은 인류에게 죽음과 파괴뿐만 아니라 ‘정신의 야만’을 전염시켰다. 인간은 공포와 의심에 사로잡혀 희생자를 찾았고, 정치인들은 실정과 무능을 숨길 목적으로 이 행동을 부추겼다. 결국 소외된 사람들이나 유대인, 집시, 이교도, 이방인은 무참하게 희생됐다. 인간은 급기야는 ‘신(神)’을 의심하고 탓했으며, 일부는 신흥종교와 마술 등을 추종했다. 결국 사회 시스템과 정치집단의 성격에 변화가 생기면서 ‘야만’의 상황이 도래했다.
전염병은 ‘전염자’와 ‘비전염자’라는 두 계급을 만들고 그 기준으로 이동, 주거장소, 식량 배급 등 모든 것을 결정했다. 전염 지역에 장벽이 만들어지면 경찰과 군대는 봉쇄하고 감시한다. 당연히 사회적 인격은 사라지고, 공동체도 파괴된 야만의 상황이 된다. 하지만 인류는 이런 난관을 모두 극복해 왔다. 살아남은 자들은 반성하면서 인간관을 교정했고 주술이나 마술, 종교의 관념과 언어 대신 의학과 기술, 산업 등을 발전시켰다.
코로나19는 문명사적으로 중요한 시금석이 될 수 있다. 이 바이러스는 세계화 시대와 디지털 문명을 이용해 각각의 허브에 침투한 뒤에 다중 복합적으로 연결된 ‘망(네트워크)’을 타고 빠른 속도로 전 지구인을 감염시키는 중이다. 또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전근대와 달리 유기적인 ‘세계망’ 체제 속에서 부분(지역)의 손상과 단절은 순식간에 전체의 붕괴를 야기하고 있다. 누구도 이 상황의 전개는 물론 본질과 의미를 예측하기 어렵다. 반면 인간의 생존본능이 더 강해졌고, 개인의 사회에 대한 참여도와 권리도 강화됐다는 점은 분명하다.
왜 이런 전염병이 발생했을까? 의학자나 자연과학자들은 병리현상과 생리적인 요인에서 원인을 규명한다. 역사 기록을 보면 대부분 전염병 사태는 발병과 확산, 관리 등 모든 면에서 인재(人災)의 성격이 강했다. 코로나19도 대응 방식, 관리 과정 등을 보면 인간의 가치관, 특정 사회의 시스템, 국가권력, 지구의 운행 시스템이 작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문명의 붕괴를 연구한 학자들은 예외 없이 인간의 과도한 욕망과 도덕성의 상실을 주요한 원인으로 꼽는다. 실제로 현대인은 존재와 생명에 대한 외경심이 약해졌고, 오만과 욕망에 가득 차 불필요한 파괴를 일상화했다. 정치인과 사업가는 물론이고, 학자와 종교인 심지어는 청년마저 권력 지향적인 생각과 행동에 몰두한다. 사회는 분열·갈등·비합리·증오·광기·탐욕으로 차올랐고, 곳곳에서 폭력·금력이 난무한다.
코로나19도 곧 퇴치할 수 있겠지만, 전염병은 또다시 발생한다. 이제는 의료와 보건기술의 발전에 전력투구하는 한편 인간성과 사회·문명의 변화 양상도 냉철하게 관찰해야 한다. 세계는 연결된 하나의 생명체이고 운명공동체란 사실을 자각하며, 자연과의 상생시스템 속에서 삶의 가치를 고양해야 한다. 코로나19 사태는 신(新)문명론의 제창과 점진적인 실천에 유용한 기회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