筆線으로 정신을 그리다…예술이 된 붓글씨 300점 한자리에

입력 2020-03-29 17:00
수정 2020-03-30 01:11

일제강점기에 널리 쓰였던 ‘서도(書道)’라는 이름을 ‘서예(書藝)’로 바꾼 주역은 서예가 손재형(1903~1981)이다. 예로부터 선비의 덕목으로 꼽혔던 육예(六藝)의 하나가 서(書)라는 데 착안했다. 형식을 강조한 중국의 서법(書法), 수양의 측면을 중시한 일본의 서도를 넘어 붓글씨를 미적 가치를 지닌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것이다.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미술의 영역 밖으로 밀려났던 서예가 1949년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 창립과 함께 미술의 한 분야로서 위상을 회복한 것은 이런 까닭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1969년 개관 이래 처음으로 마련한 서예 기획전 ‘미술관에 서(書): 한국 근현대 서예전’은 서예의 근현대사를 조명하는 자리다. 전통적인 붓글씨가 현대성을 띤 서예로 변화하는 다양한 양상을 서예·회화·전각·조각·도자·미디어아트 등 300여 점의 작품과 70여 점의 자료로 보여준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전시 준비를 마치고 지난 12일 개막할 예정이었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미뤄오다 30일 오후 4시 자체 유튜브 채널(MMCA Korea)을 통해 먼저 공개한다. 이번 전시를 준비한 배원정 학예연구사가 전시장을 돌면서 기획 취지와 주요 작품을 설명하는 90분짜리 영상을 만나볼 수 있다.

전시는 동아시아의 오랜 전통인 ‘시서화(詩書畵)’ 일체 사상이 근대 이후 어떻게 계승, 변모됐는지 살피는 것으로 시작한다. 해방 이후 화가들은 민족미술의 부흥과 한국적 모더니즘을 창출하는 한 방편으로 서예에 주목했다. 서예가들 역시 전통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근대성을 담아내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열아홉 살 때 해강 김규진에게 서예와 문인화를 배운 고암 이응노가 1970년께 서예 붓으로 수묵화를 그리는 기법을 이용한 ‘전면점화’를 선보인 것이나 한국화 대가였던 월전 장우성과 추상조각의 선구자 김종영이 글씨를 배운 것은 그런 맥락이다. 필획의 찰나적이고 일회적인 속성을 회화에 반영한 이우환은 ‘그리기’가 아니라 ‘쓰기’가 작품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화가이자 미술사학자였던 근원 김용준(1904~1967)이 1947년 서울 성북동의 수화 김환기(1913~1974) 집을 방문했을 때 그린 ‘수화소노인가부좌상’, 월전 장우성이 90세 되던 해에 선글라스와 배꼽티 차림에 휴대폰을 든 20대 여성을 먹으로 그린 ‘단군일백오십대손’은 글과 그림이 어우러져 한 폭의 만화 같은 느낌이다. 김환기가 미당 서정주의 시 ‘기도(祈禱) 일(壹)’을 한글로 적고 달항아리와 매화를 화폭에 가득 담은 1954년작 ‘항아리와 시’는 문인화의 시서화 일치 사상을 수묵 대신 유채로 표현한 작품이다.

빠른 붓놀림에 의해 선들이 화면 전반을 가득 채우는 서체추상, 힘 있는 붓놀림으로 구축된 견고한 선이 화면의 무게중심을 잡는 문자추상 등 서예가 추상으로 나아가는 경향도 보여준다. 진한 먹으로 예서의 두툼한 획들을 모아 이미지를 구축한 김기창의 ‘문자도’, 패널에 유채로 그렸으나 그림과 글씨의 경계를 넘나드는 남관의 ‘흑과 백의 율동’, 1980년대 이후 글자의 해체된 필획과 어우러진 김창열의 ‘물방울(해체)’, 서양화를 전공했으나 어릴 적에 배운 서예의 흔적을 작품에 많이 남긴 오수환의 작품, 이응노의 콜라주 문자추상 등이 눈길을 끈다.

한국 근현대 서예가 1세대 대가 12명의 대표작은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다. ‘글씨가 그 사람이다(書如其人)’라고 했다. 손재형을 비롯해 고법(古法)의 재해석을 주장한 여초 김응현, 58세에 오른손이 마비돼 글씨를 못 쓰게 되자 필사적인 노력 끝에 좌수서(左手書)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검여 유희강, 단순한 필선으로 대상의 정신을 형상화한 소암 현중화, 시서화를 모두 갖춘 20세기 마지막 선비화가로 평가받는 강암 송성용, ‘평보체’로 한글 서예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평보 서희환 등의 작품이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1세대 대가들의 뒤를 이어 전통의 계승과 재해석은 물론 실험과 파격을 통해 새로운 예술의 경지에 도전한 권창륜 이돈흥 박원규 황석봉 등 2세대 명인들의 작품들도 한자리에 모았다. 문장의 내용이나 가독성보다 서예적 이미지에 집중함으로써 ‘읽는 서예’에서 ‘보는 서예’로 나아가는 경향이 뚜렷하다.

근래에는 글씨가 디자인을 만나 캘리그래피와 타이포그래피 등으로 확장되고 있는 추세다. 옛날 교과서와 신문, 잡지 등의 제호를 장식했던 글씨부터 감성적 시각예술로 거듭난 캘리그래피와 타이포그래피 등을 통해 현대 서예의 확장 가능성을 제시한다. “서예 교과서를 만든다는 각오로 준비한 전시”라는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의 말이 과장으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내용이 탄탄하다.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