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길의 경제산책] 물 건너간 전기료 인상…한전 악재 어디까지

입력 2020-03-25 09:48
수정 2020-03-25 10:08

문재인 대통령이 어제 열린 주례 비상경제회의에서 전기요금을 면제 또는 유예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코로나19 사태가 확산하면서 경제 체력이 급속히 악화하는 만큼 국민·기업 부담을 줄여주자는 취지이죠. 또 “4월부터 바로 시행될 수 있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는 즉각 전기요금 완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요금을 깎아줄 방법이 마땅치 않아 상당히 고민스러워합니다.

국내 대표 공기업인 한국전력이 전기요금을 낮추면 쉽겠지만 현실적으로 작지 않은 부담이 따릅니다. 한전 전기공급약관에 따르면 자연 재난이 발생했을 때 멸실 건축물에 한해 전기요금 감면이 가능합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재난’으로 규정하더라도 멸실 건축물 규정을 적용하기 곤란합니다. 약관을 고치자니 절차가 까다롭고 ‘선례’를 남길 수 있다는 게 약점이죠.

무엇보다 한전이 전기요금을 깎아줄 여력이 없습니다. 2017년까지만 해도 한해 수 조원의 이익을 내는 회사였지만 탈원전 정책과 함께 최악의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2018년부터 2년 연속 적자를 기록했는데, 작년 영업손실(-1조3566억원)은 2008년 이후 11년만에 가장 큰 폭이었죠.

정부가 매달 전기요금에서 3.7%씩 떼는 전력산업기반기금을 활용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전력기금은 작년 기준 4조4714억원 적립돼 있지요. 하지만 전력기금은 전기사업법에 따라 ‘전력산업의 기반조성 및 지속적 발전’을 위해 쓸 수 있습니다. 전체 국민과 기업의 전기요금을 깎아주는 데 쓴다면 법을 개정해야 합니다. 이 역시 쉽지 않습니다.

정부는 예산 투입을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보고 있습니다. 정부는 1차 때의 11조7000억원에 이어, 이와 비슷하거나 더 큰 규모의 2차 추가경정예산안을 추진하고 있지요. ‘전가의 보도’처럼 쓰고 있습니다만, 국채 발행을 통한 예산 확보가 사실상 유일한 대안이란 겁니다.

다만 전체 사용자를 대상으로 전기요금을 단 1%만 깎아줘도 약 5000억원 소요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요금 감면보다 일정기간 ‘납부 유예’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검토될 것으로 보입니다. 국민들 입장에선 전기요금 납부 시기를 몇 개월 늦춰주는 게 별 도움이 되지 않지만 철강 반도체 자동차 등 전력 다소비 기업 입장에선 다릅니다.

우리나라 전기 사용량을 보면, 기업들이 주로 쓰는 산업용이 작년 기준으로 전체의 55.6%(작년 기준)에 달합니다. 다음으로 상가 등 일반용 22.3%, 주택용 14.0%, 농사용 3.6%, 교육용 1.6% 등 순이죠. 전체 전기 소비의 절반 이상을 기업들이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정부는 별도로 취약층에 한해 전기요금을 선별적으로 감면해주는 대책을 내놓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미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된 대구·경북, 경산, 봉화, 청도지역의 소상공인 대상으로는 다음달부터 6개월 간 전기요금의 절반씩 깎아주기로 했지요. 재원은 모두 예산(1차 추경)입니다.

정작 한전의 고민은 다른 데 있습니다. 올 하반기부터 전기요금을 인상하려고 야심차게 준비해 았는데 도루묵이 돼 버렸기 때문입니다. 전기요금 감면을 고민해야 할 시점에, 요금 인상을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한전이 올해 전기요금을 올리지 못할 경우 3년 연속 적자를 기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탈원전,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석탄발전 감축, 온실가스 배출권 비용 상승, 신재생에너지 투자 확대 등 에너지 공기업의 고비용 구조가 고착돼 있습니다.


더구나 가장 큰 수익원인 전력판매 수요마저 감소하고 있습니다. 작년 전력 판매량은 총 5억2049만㎿h로, 전년 대비 1.1% 감소했지요. 경기 침체 탓이었습니다. 산업용 전력수요가 1.3% 위축된 게 이를 방증합니다. 전력수요 감소는 20년 만에 처음이었죠. 이 때문에 작년 전기판매 수익이 전년 대비 9030억원 줄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올해 전력 판매량은 더 위축될 공산이 높습니다.

한전 주가는 현재 주당 19000원 안팎을 기록 중입니다. 현 정부 출범 후 작년 말까지 40% 급락했는데 코로나19 확산 이후엔 마이너스 폭이 60%에 달합니다. 2년 연속 주주 배당도 하지 못했죠. 전기요금 인상마저 불발될 처지에 놓이면서, 한전은 벼랑 끝까지 몰렸습니다.

한전이 2016년처럼 12조원 이상 영업이익을 내는 우량기업으로 유지됐더라면, 정부와 한전이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국민과 기업을 위해 쓸 수 있는 카드가 많았을 겁니다.

조재길 기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