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제·혼합·재구성으로 빚어낸 하이브리드의 美

입력 2020-03-24 17:59
수정 2020-03-25 00:27

펠레스 엠파이어는 이질적인 요소의 결합을 통한 혼종성(hybridity)의 미를 추구하는 여성 작가 그룹이다. 루마니아의 바바라 볼프(40), 독일의 카타리나 스퇴버(38)가 2005년 그룹을 결성한 이후 원본과 복제품, 현대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 우아한 것과 하찮은 것, 2차원과 3차원, 과정과 결과 등 온갖 이질적이거나 대비되는 요소를 뒤섞고 재편해 새로운 질서를 모색해왔다.

예컨대 화려한 3차원의 공간은 이를 촬영해 A3 용지로 출력한 2차원의 종이가 되고, 이는 다시 다층으로 쌓여 대리석처럼 견고해 보이는 조각이 된다. 여기에 도자기, 콘크리트, 나무, 거품, 제스모나이트 같은 이질적인 재료들이 더해지면서 점차 추상적인 작품이 돼간다.

서울 삼청동 바라캇 컨템포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여기에도, 나는 있다’전은 펠레스 엠파이어의 이런 작업을 잘 보여주는 자리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높이 6m의 벽면이 거대한 작품이 돼 시선을 압도한다. 바라캇 컨템포러리의 바닥을 촬영한 이미지를 자신들의 작품과 혼합해 A3 용지로 출력한 다음 벽면 전체에 붙였다. 전시장의 바닥과 벽이 한데 어우러져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시장 바닥에는 화산지대의 현무암으로 만든 것 같은 검은색 조형물들이 놓여 있다. 조형물에는 비취색의 흔적이 있거나 비취색 끝을 둘러놓았다. 고려청자 등 한국의 도자 전통에서 영감을 받은 신작이다. 전시장 벽에는 양을 치는 목동의 이미지, 성모마리아처럼 서 있는 클레오파트라의 이미지가 걸렸다. 이 모든 것은 각각이 하나의 작품인 동시에 전체로는 설치 작업이다. 2017년 독일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에서 공공미술 작품으로 크게 주목받은 볼프와 스퇴버는 2005년 루마니아의 유명한 펠레스 성을 방문했다가 공동작업을 시작했다. 그리스·로마, 고딕, 로코코, 아르데코 등 다양한 양식이 혼재된 성의 내부에 매력을 느끼고 이를 촬영해 작품으로 재현했다. 복제를 거듭한 이미지는 원본과 복제본의 구분이 모호한 추상이 되면서 새로운 원본으로 탄생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의 작업 방식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빗살무늬토기, 신라 토우 고려청자에서 영감을 받아 조형물을 만들었다. 이미지를 출력했던 종이를 태우는 장면을 촬영해 그 위에 목동, 클레오파트라 등의 이미지를 씌우고 이를 제스모나이트 위에 구현했다. 전시는 다음달 26일까지.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