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최악의 위기를 맞은 국내 기업과 산업에 대한 지원책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유례없는 생산·소비 절벽으로 생사의 기로에 내몰린 기업들을 살리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게 산업계의 중론이다. 타격이 가장 큰 항공·해운과 정유, 자동차 부품업계를 위한 특단의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제주항공 등 국적 항공사 임원들은 19일 긴급회의를 열어 국토교통부에 추가 지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최악 위기’ 맞은 정유·유통업체
산업계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에쓰오일 현대오일뱅크 등 국내 정유회사들은 이중고를 겪고 있다. 코로나19로 국제 유가가 급락하면서 수익성이 크게 악화한 데다 석유제품 수요마저 급감한 탓이다.
국제 원유 가격이 배럴당 20달러대로 떨어지면서 석유제품 가격에서 원자재 비용을 뺀 정제마진은 배럴당 평균 -2.4달러(지난 16일 기준)가 됐다. 공장을 돌리고 제품을 팔수록 손해가 난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정제마진은 배럴당 2.5달러(월평균) 수준이었다.
증권가에선 정제마진 급락으로 국내 1위 정유사 SK이노베이션의 1분기(1~3월) 정유부문 영업손실 규모가 67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렇게 될 경우 분기 기준 사상 최대 적자가 된다. 국제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이날 GS칼텍스의 수익성이 올해 크게 저하될 것이라며 이 회사의 장기 신용등급을 ‘BBB+’에서 ‘BBB’로 한 단계 내렸다.
국내 정유사들은 원유에 붙는 세금을 한시적으로 면제하거나 낮춰줄 것을 정부에 바라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원유에 관세를 부과하는 국가는 한국과 미국 호주 멕시코 등이다. 산유국을 빼면 한국만 원유에 관세를 물린다. 정유업체들은 석유수입부과금(L당 16원)도 일시적으로 감면해주기를 원하지만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지난해 정유사들이 낸 석유수입부과금은 1조4000억원에 달했다.
소비자들의 발길이 뚝 끊긴 유통업계도 정부의 직접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국내 주요 백화점의 3월 매출은 지난해 3월보다 30~50%가량 줄어들 것이라는 게 업계의 전망이다. 그런데도 교통체증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물리는 교통유발부담금은 매년 20%씩 증가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들이 해마다 부담금을 올리고 있어서다.
생사기로에 놓인 자동차 부품사들도 정부 지원을 바라고 있다. 한 자동차 부품사 대표는 “완성차 회사로부터 오는 주문량이 끊겨 다른 자동차 부품사들도 대부분 숨이 넘어갈 지경”이라고 전했다.
“대기업도 쓰러질 수 있다”
항공업계는 정부 지원책이 임시방편이며 실효성이 없다고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정부는 지난달 17일 3000억원가량의 긴급 운영자금을 저비용항공사(LCC)에 대출해주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 가운데 현재까지 400억원만 지원됐다. 이마저도 에어부산·에어서울이 받은 340억원은 지난해 확정된 모기업인 아시아나항공의 경영정상화 지원금 중 일부라서 코로나19 사태 이후 신규로 집행된 금액은 40억원에 불과하다. 지원 대상에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같은 대형 항공사는 빠져 있다. 미국 정부는 모든 자국 항공사에 500억달러(약 65조원)를 지원하기로 했다.
국내 항공업계는 전 세계 150개국이 한국발(發) 입국을 제한함에 따라 올해 상반기 매출이 6조3000억원가량 감소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항공기 10대 중 9대가 운항하지 못하는 마당에 공항 착륙료를 20% 깎아주겠다는 정부 지원책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목소리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제주항공, 진에어, 에어부산 등 5개 항공사 임원들은 이날 긴급회의를 열어 정부에 실효성 있는 추가 지원을 요구하기로 했다. 대형 항공사도 지원 대상에 포함하고 항공사가 채권을 발행할 때 정부(국책은행)가 지급 보증을 해달라는 내용이 건의안에 담길 예정이다. 전 세계 항공업계의 유동성 위기로 항공사 자체 신용만으로는 채권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권태신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은 “정부 지원이 일부 업종이나 중소기업에 제한되면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처럼 대기업이 연쇄 도산 위기에 몰릴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정인설/이선아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