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 국채 회사채 금 은 원유 구리 비트코인까지 모든 자산이 폭락한 날이었습니다. 오른 건 모두가 원하는 달러, 그리고 '공포지수'로 불리는 변동성 지수 밖에 없었습니다.
18일(현지시간) 뉴욕 금융시장에서는 가시화된 경기 침체 속에 "현금 확보!"란 목소리만 들렸습니다. 자산 가격의 수준에 상관없이 투매가 일어났습니다.
만기 1년 이하 미 국채의 경우 금리가 마이너스 0.02%까지 떨어졌습니다. 언제든 현금으로 유동화할 수 있는 '단기' 안전자산 확보에 수요가 몰리면서 이런 기현상이 나타난 겁니다.
국채라도 듀레이션이 긴 10년물의 경우 금리가 급등(가격 폭락)했습니다. 10년물 미 국채의 금리는 이날 10bp(1bp=0.01%포인트) 오른 연 1.16%로 마감됐습니다. 장중 연 1.2%를 훌쩍 넘었습니다. 장기물은 상대적으로 현금으로 바꾸기가 쉽지않지요.
안전자산의 대명사 금은 온스당 1480달러대로 추락했고, 유가의 경우 서부텍사스원유가 한 때 24% 폭락한 배럴당 20달러 초반까지 떨어져 2002년 이후 18년만에 최저치로 내려앉았습니다.
반면 달러 가치는 하루만에 1.4% 올라 인덱스는 101.2를 기록했습니다. 장중 102를 넘기도 했지요. 모두가 달러 '현찰'을 원한다는 뜻입니다.
영국 파운드의 경우 달러대비 3% 가량 급락해 1파운드당 1.14달러까지 거래되며 35년 만에 최저치로 내려앉았습니다.
월가 관계자는 "모두가 현금 확보를 위해 가격에 상관없이 자산을 던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경기 침체의 공포가 가장 크겠지요. 이날 JP모간은 2분기 미국의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14%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을 바꿨습니다. 도이치뱅크도 마이너스 13%로 전망했습니다.
수치가 어쨌건 침체, 아니 불황은 공식화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면 현금을 쥐고 있어야합니다. 금융시장은 미 중앙은행(Fed)의 '헬리콥터 머니'에도 곳곳에서 거래가 중단된 상황입니다.
여기에 기술적인 측면도 이런 매도세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금융규제와 리스크 관리를 말합니다.
이날 통화를 한 월가 관계자의 말을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볼커룰 등 금융사에 대한 규제가 매우 강화됐다. 각 금융사 내부적으로도 리스크 매니지먼트(위험 관리)가 매우 강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에 코로나 바이러스 발병이 터지면서 모든 위험자산의 가격 하락이 너무 빠르게 진행됐다. 자산 가격이 급변하며 변동성은 치솟았다.
모든 리스크 매니지먼트에서 변동성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변동성이 커지자 위험관리 지표에서 매각해야하는 조건이 트리거(발동)됐고 지금은 금융사 입장에서는 위험자산을 팔아 현금을 확보하는게 가장 큰 업무가 됐다. 자산운용사들은 거기에 리뎀션(펀드 환매) 요구까지 커지고 있다.
그래서 모든 투자회사가 자산을 매도하고 있다. 이럴 때는 가격은 문제가 아니다. 우선은 팔아 현금을 확보해야한다. 전통적으로 안전자산으로 간주되어온 금도, 미 국채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 모든 투자회사들은 '리스크를 줄여라, 밸런스시트(자산)를 줄여라'가 가장 큰 과제다."
-"미 중앙은행(Fed)이 레포(환매조건부채권)를 통해 엄청난 유동성을 공급하고 있다. 이번주에는 오전, 오후 모두 1조달러를 공급하고 있다.
하지만 돈을 바꿔가는 수요는 그에 미치지 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은행 입장에서는 단기로 돈을 빌려 장기로 운용하는 게 기본수익구조인데 위험관리 측면에서 지금은 투자나 대출이 모두 어려운 상황이다.
볼커룰 때문에 투자할 길은 막혔고, 대출을 하려니 위험이 너무 크다. 은행들은 각 산업, 각 기업별로 익스포져(노출도)가 있는데 이들의 크레딧을 평가할 때도 변동성이 들어간다. 지금은 변동성이 너무 커져서 대출을 줄 수 없다. 그러니 레포 자금을 받아와도 쓸 곳이 마땅치 않다."
-"모든 투자자들이 현금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바닥을 논하기 어렵다. 지금 바닥을 주장하는 사람은 엉터리다. 아무도 바닥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정말 이런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시장을 잠시 문닫는 게 아닌 지 모르겠다."
-"바닥에 대한 콘센서스가 없을 때가 사야 할 타이밍이라는 말도 있지만, 모든 투자자가 워렌버핏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월가에서 변동성 거래를 전문으로 해온 헤지펀드 멜라카이트 캐피털 매니지먼트가 펀드 폐쇄를 결정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회사는 보도자료를 내고 "최근 몇 주 동안의 극심한 시장 악조건, 그에 따라 악화된 펀드 수익률로 인해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며 "펀드를 즉시 해산하는 게 펀드와 투자자들 이익에 가장 부합한다고 판단했다"고 밝혔습니다.
변동성을 전문으로 하는 이들이 2주만에 문을 닫을 정도로 뉴욕 금융시장은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코로나 바이러스는 미국과 뉴욕을 막 덮치고 있습니다.
뉴욕=김현석 특파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