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잘못된 호적, 쓰디쓴 탄식

입력 2020-03-17 17:53
수정 2020-03-18 00:13
호적 등재가 잘못됐다. 나이는 두 살 줄었고, 생일 또한 실지와는 하등 관련이 없는 얼토당토않은 날로 되어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영아 사망률이 높았던 시절 어른들께서 출생신고를 늦게 한 탓이다.

작은 누님과 나 사이의 3남매가 젖먹이 때 내리 죽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 부모님은 나를 낳고도 당연히 얼마 못 가 죽을 것으로 예견했던 것 같다. 특히 내가 태어났을 때는 6·25전쟁 중이었다. 목숨이 질겼던 것일까, 아니면 운이 좋았던 것일까. 아무튼 나는 저 무시무시한 홍역까지 물리치면서 꼼지락꼼지락 살아났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이 못난 아들을 신통하게 여기고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동네 구장을 통해 면사무소에 출생신고를 했다. 이렇게 볼 때, 호적에 올라 있는 나의 생년월일은 아마도 선친께서 출생신고를 한 날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동기간의 호적은 특별한 이상이 없고, 내 경우에만 그렇게 되었으니 이 또한 운명이거나 팔자소관인 것 같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면 초등학교를 적령기에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발생했다. 고3 때 만 18세였지만 호적 나이는 겨우 만 16세밖에 되지 않았다. 졸업을 앞두고 앞이 캄캄했다. 집안 형편이 극빈 중의 극빈인지라 대학 진학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취업이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웬걸 연령 미달로 취직 시험을 볼 수가 없었다.

법원의 결정을 통해 호적 정정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 일을 추진하려면 우선 사법서사(현 법무사)의 힘을 빌려야 할 텐데 수수료와 인지대 등 최소한의 비용조차 부담할 형편이 못 됐다. 따라서 ‘잃어버린 2년’을 고스란히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고교 졸업 후 객지로 뛰어들어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었다. 그 처절한 밑바닥 인생행로야말로 ‘눈물 없이는 감상할 수 없는 영화’였고, 그 이후에도 이런저런 불이익이 줄기차게 따라왔다. 공무원이라면 이게 웬 떡인가 엿가락 늘이듯 정년을 2년 더 연장하는 홍복(洪福)을 누렸겠지만, 애오라지 전업 작가라는 미명 아래 별 볼 일 없는 서민으로 근근이 살아온 나에게는 그런 횡재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 대신 각종 의무 이행 연한을 채우느라 고스란히 2년을 더 ‘헌납’했다. 향토예비군과 민방위대 훈련을 2년 더 받았고, 지하철 무임승차 혜택과 그 알량한 국민연금 수령이 2년 늦어졌다. 그런 까닭에 지금도 신분증의 주민등록번호 앞자리 생년월일을 들여다보노라면 저 젊은 날의 뼈저린 아픔이 한 편의 흑백영화처럼 되살아나면서 저절로 쓰디쓴 탄식이 쏟아져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