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공급원' 경상흑자 급감…"4091억弗 외환보유액 충분치 않아"

입력 2020-03-16 17:19
수정 2020-03-17 10:33

통화가치 폭락을 불러온 외환위기가 태국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지던 1997년 7월. 한국 정부는 “펀더멘털(기초체력)이 튼튼하다”며 안이한 대응으로 일관했다. 근거는 직전까지 연 8%대에 달했던 경제성장률. 하지만 외국인 투자자들이 주목한 지표는 따로 있었다. ‘수출주도 경제’인 한국의 경상수지였다.

그해 상반기 경상수지 적자가 92억달러인 것을 확인한 외국인이 “한국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뒤 자금 회수에 나섰다. 외환·증권시장이 흔들렸고, 대기업이 줄도산했다. 대외무역으로 기축통화 달러를 벌어들이지 못하면 ‘외환 방파제’는 속절없이 무너지고 만다.

“상반기에 또 적자 낼 가능성”

경제위기가 닥치기 전에는 어김없이 경상수지가 악화했다. 금융위기 직전이던 2008년 상반기(-72억1870만달러), 유럽발 재정위기가 닥쳤던 2011년 상반기(-67억2360만달러)가 대표적이다. 수출이 고꾸라진 데다 외국인이 국내 주식·채권을 닥치는 대로 팔아치운 결과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급속히 퍼지고 있는 올 상반기도 경상수지에 경고등이 켜졌다. 흑자 규모가 빠르게 줄면서 작년 4월(-6억6000만달러)처럼 적자를 내는 달이 나올 것이란 관측이다. 경상수지 흑자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무역수지가 감소하고 있어서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달 하루평균 수출액은 18억3000만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11.7% 급감했다. 코로나19 충격으로 중국산 부품 조달이 끊기면서 자동차 수출이 25.0% 줄어든 여파가 컸다. 올해 수출 증가 및 단가 상승을 기대했던 반도체 시장도 혼조세로 전환했다.

수출 충격은 갈수록 커질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유럽인의 입국을 전면 금지하는 등 글로벌 무역 단절이 심해지는 양상을 보여서다. 현재 한국인 입국을 막거나 입국 절차를 강화한 국가는 130개국에 달한다. 한국의 10대 수출국(중국·미국·베트남·홍콩·일본·대만·인도·싱가포르·멕시코·말레이시아) 중에선 미국을 제외한 9개국이 한국인 입국을 제한하고 있다.

최근 국제 유가 폭락으로 산유국인 중동과 러시아, 중남미 등지로의 수출도 급감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수출이 작년(-10.3%)에 이어 큰 폭으로 감소할 것이란 전망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관광 수익 등을 반영하는 서비스 수지도 타격을 받고 있다. 지난달 한국을 찾은 중국인 관광객은 작년 동기 대비 76.1% 급감했다.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은 “한국 경제는 여러 가지 악재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퍼펙트 스톰 위기에 직면했다”며 “중국 성장률이 5%대로 내려앉고 미국 및 유럽연합(EU)과의 교역이 감소하면 한국 경제 성장률도 1% 밑으로 주저앉을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신용 악화 땐 외화조달 비상

경상수지 악화는 실물·금융·외환을 아우르는 복합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경고다. 기업 실적이 쪼그라들면서 투자·내수까지 위축될 수 있어서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수출 및 투자 감소는 총수요에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며 “기업이 고용을 줄여 가계 살림살이가 나빠지면 장기 내수 침체도 불러올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외환시장에 끼치는 부정적 파급은 훨씬 크다는 분석이다. 경상수지 감소로 국가·기업 신용도가 하락하면 외국인 투자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다. 국내 은행 및 기업들이 해외에서 조달하는 자금 비용도 급증할 수 있다. 금융위기 당시 2008년 9월 30일 연 2.8%였던 하루짜리 달러 차입금리는 이튿날 연 12%까지 치솟기도 했다.

이규엽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무역투자정책팀장은 “코로나19 사태 발생 후 해외 수요 위축과 중간재 수입 차질이 장기화할 가능성을 고려해 취약기업 및 가계에 대한 금융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제 신용평가사들은 한국의 경상수지에 이상 신호가 발생할 때마다 기업 및 국가 신용등급을 낮춰왔다. 이 때문에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최근 수출 비중이 높은 한국 기업의 신용등급을 무더기로 낮춘 사례를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김익환/조재길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