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현지시간) 뉴욕 증시에서 다우지수는 2352.60포인트, 9.99% 폭락했습니다. 그 유명한 1987년 '블랙먼데이' (-22.6%) 이후 두번째로 큰 낙폭입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지수와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지수도 나란히 9%대 무너졌습니다.
주식만 폭락한 게 아닙니다. 위기 때면 오르는 채권이나 금 가격도 동반 급락했습니다. 비트코인까지 사실상 모든 자산이 박살났습니다. '공포지수'로 불리는 변동성지수(VIX)는 그야말로 수직으로 치솟아 75.47에 달했습니다. 2008년 금융위기때나 볼 수 있었던 레벨입니다.
이날 국제 금융시장의 비극은 '인재'(人災)로 시작됐습니다. 11일 밤 9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을 앞두고 월가는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한 국가 비상사태 선포, 경제 둔화를 대응하기 위한 재정 정책 등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바이러스를 "외국 바이러스" "중국 바이러스"라고 부른 뒤 유럽과의 통행을 30일간 전면 차단했습니다. 미국은 유럽과 한해 상품무역 규모만 7000억달러를 넘어 중국보다 더 큽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특히 이런 중대한 일을 유럽과 사전 논의도 없이 발표해 유럽에선 당장 반발이 쏟아졌습니다. 유럽에 있는 수많은 미국인, 미국에 있는 더 많은 유럽인들은 13일 이전에 돌아가기 위해 한꺼번에 공항으로 몰리면서 이날 비행기표 값은 치솟았습니다. 엄청난 경제 혼란이 생기고 있는 겁니다.
월가가 "통화정책으로는 모자라며, 제대로된 재정정책만이 중단된 경제 활동으로 인한 피해를 효과적으로 줄일 것"이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둔감합니다.
이번 사태 전부터 추진해오던 급여세 감세를 이번 일을 계기로 통과시키겠다는 정도입니다. 기업들이 부도나고 해고가 이어질 경우, 급여세 감세는 큰 효과가 없습니다. 이날 민주당은 자체 대책을 내놓았고, 공화당은 반대하는 등 정치권의 난맥상 속에 당장 제대로된 대응책을 기대하기 힘들어졌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날 공개한 사우디아라비아의 모하메드 빈 살만 왕세자와 통화 내용은 황당합니다. 트럼프는 "나는 (왕세자에게) 낮은 휘발유 값을 좋아한다고 말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휘발유 값 하락은 감세와 같다"고 덧붙였습니다.
국제유가 폭락으로 수많은 미국 셰일업체들의 부도가 우려되고, 이들의 회사채 값이 급락해 금융시장이 얼어붙은 가운데 한 발언입니다. S&P 500의 에너지 섹터의 주가는 올들어 56%나 내렸습니다.
월가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은 초기에 코로나바이러스의 심각성을 폄하했다가 스텝이 꼬였다"면서 "대통령이 이런 자세를 유지하는 한 제대로된 재정 정책을 기대하긴 어렵다"고 한탄했습니다.
이어 유럽에서도 '인재'가 터졌습니다. 유럽중앙은행(ECB)이 12일 내놓은 처방전은 양적완화와 은행의 유동성 확보 조치였습니다. 예금금리를 0.1%포인트 내릴 것이라는 시장의 기대는 틀렸습니다. 이미 예금금리가 -0.5%인 상황이어서 내려도 별 효과는 없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의 기자회견이었습니다. 라가르드 총재는 "중앙은행이 우선 대응할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되고, 재정정책이 우선돼야 한다"고 ECB는 할 일을 다했다는 식으로 발언했습니다. 특히 이탈리아의 국채 금리가 급등하고 있는데 대해 "스프레드를 좁히기 위해 여기 있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발언은 과연 ECB가 이탈리아 등 재정이 취약한 나라들을 위한 특별지원에 나설 것인지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이탈리아 채권 금리는 폭등했고, 증시는 무려 17% 추락했습니다. 이는 당연히 국제 금융시장의 불안을 키웠습니다.
게다가 이머징 마켓에서는 위험자산에 대한 디레버리징으로 투자가 빠져나가면서 멕시코, 아르헨티나 등에선 통화가치가 폭락했습니다. 아시아 지역 달러화 표시 투자등급 채권의 스프레드 역시 170bp까지 올라가 2018년 말 이후 최고치를 나타냈습니다.
이에 따라 달러 수요가 급증하면서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주는 ICE 달러지수는 이날 0.89% 오른 97.37에 거래됐습니다. 이번주 초 94까지 떨어졌던 데서 순식간에 3% 이상 오른 겁니다.그리고 열린 뉴욕 금융시장에서 주식과 채권, 금, 유가 등이 모두 폭락한 겁니다.
월가 관계자는 "모든 자산이 동반 폭락한 건 마진콜(증거금 추가 납부 통지)과 청산매매( 투자자가 마진콜에 응하지 않을 경우 거래소가 강제로 반대매매하는 것)가 발생한 탓"이라고 분석했습니다.
통상 펀드는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면서 여러 자산과 선물 등에 분산투자해 안정성을 추구하는데, 모든 자산이 동시에 급락하자 걷잡을 수 없는 손실이 발생한 겁니다. 이는 이날 오후 3시30분 장 마감 30분을 앞두고 주가 폭락세가 심화되자 국채 금리가 동반해 치솟은 게 이를 대변합니다.
통상 주식이 내리면 안전자산인 채권에 매수세가 몰리면서 채권 값이 상승(금리는 하락)하지만, 이날은 채권 값이 동반 폭락(금리는 상승)한 것입니다.
하나의 예가 있습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리스크 패리티 펀드는 큰 손해를 내 디레버리징 위기에 몰렸습니다. 이 펀드는 주식과 원자재, 채권 등 다양한 자산을 투자하면서 특정 자산의 변동성(위험)이 커지면 상대적으로 변동성이 작은 자산으로 옮겨가도록 설계된 펀드입니다. 한 쪽에서 손실이 발생하면 다른 쪽에서 만회할 수 있게 만든 것이죠.
그런데 모든 자산이 급락하자 큰 손실을 내면서 손절매에 내몰린 겁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이 펀드의 규모는 2018년 기준으로 5000억달러에 달합니다. 이와 비슷한 구조인 변동성 타켓팅 펀드의 자산도 3500억달러 수준입니다.
세계적인 헤지펀드 브릿지워터의 웰스프론트 리스크 패리티 펀드(운용액 9억4800만달러)는 이번 주 월요일과 수요일에만 8% 이상 손실을 봤습니다.
미 중앙은행(Fed)은 이런 금융시장 혼란을 급하게 돈으로 막으려고 나섰습니다. Fed는 작년 10월부터 매월 600억달러 상당을 단기 국채 매입에 써왔는데, 이날 매입 대상을 모든 국채와 물가연동채(TIPS) 등으로 확대했습니다. 사실상 양적완화 재개 선언입니다.
또 레포(환매조건부채권) 운용을 해온 뉴욕 Fed는 3개월물 레포를 이날부터 매주 한 번 5000억달러 한도로, 또 1개월물 레포도 13일부터 매주 한번 5000억달러 한도를 운용하기로 했습니다.
3개월물 레포는 내일도 한 번 더 공급하기로 했기 때문에 12~13일 추가 공급되는 유동성 규모만 무려 1조5000억달러에 달하게 됩니다.
현재 하루짜리 레포가 매일 1750억달러 한도로 공급되고 있고, 2주짜리로 450억달러가 공급되고 있는 상황에 1조5000억달러를 추가로 쏟아붓는 겁니다.
이 발표가 나온 뒤 다우는 30분간 21360에서 22837까지 1500포인트 가량 반등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습니다. 이후 날카롭게 추락해 다우는 21200.62로 마감됐습니다.
월가에는 Fed가 오는 18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기준금리를 '제로'로 만들 것으로 관측합니다.
시카고상품거래소의 연방기금금리 선물시장에서는 3월 제로금리 가능성을 86.7%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씨티와 JP모간, 골드만삭스도 3월 혹은 4월이면 제로금리가 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하지만 Fed의 노력만으로 이번 사태가 해결될 지에 대해선 아무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정부의 대규모 재정 정책이 더해져 경제적 고통을 줄이고, 결국은 백신이 개발돼 감염사태가 해결되어야할 겁니다.
월가 관계자는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이 어디까지 이어질 지 모르는 탓에 시장 움직임을 예상할 수 없어 더 불안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날 월가가 있는 뉴욕시는 '비상사태'를 선포했습니다. 블랙록, 바클레이즈, 모건스탠리 등에서 줄줄이 감염자가 나오고 있습니다. 뉴욕 금융시장의 불안감은 당분간 이어질 듯 합니다.
뉴욕=김현석 특파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