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대동법으로 백성 살린 '조선의 개혁가' 김육

입력 2020-03-12 18:03
수정 2020-03-13 02:58
조선 중기 문신이자 실학자 김육(1580~1658)은 17세기 후반 공납제도의 폐단을 혁파하기 위해 대동법 시행을 주장했다. 12세에 ‘세상을 다스려 백성을 고난에서 구제한다’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뜻을 품은 그는 70대에 정승 자리에 올라 충청도와 전라도에 대동법을 시행하며 자신의 오랜 소신을 펼쳐나갔다. 무수한 역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학문을 연마하며 정책 이념을 정립했던 김육은 자신의 이상을 추진해 조선 후기의 경제와 사회 발전에 밑바탕이 됐다. 이런 탁월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개혁가 김육을 깊이 다룬 책은 많지 않았다.

이헌창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가 쓴 《김육 평전》은 대동법, 동전통용책 등 조선에서 가장 의미있는 성과를 거둔 경제 정책을 시행한 김육의 생애와 업적을 살피며 조선 경제사를 개괄한다. 저자는 “김육은 17, 18세기 조선의 경제 성장을 일군 개혁가”라며 “그의 업적이 곧 조선 경제사의 업적”이라고 평가한다.

김육은 부국강병의 실패, 정책 구현 역량의 부족, 구조적 부정부패 등 조선 왕조의 약점을 제도 개혁으로 하나씩 극복했다. 대동법은 조세 제도를 공평하고 효율적으로 만든 획기적 개혁이었다. 토지 결수에 따라 정량의 쌀로 조세를 납부해 기존 공물 납부 방식의 문제점을 해결했다. 지방정부의 불법적 징세와 방납인 관리에 의한 중간 수탈을 막은 것은 물론 납세자 부담이 줄고 조세 부과 기준이 명확해졌다. 저자는 “대동법은 민생 안정, 재정 충실화, 시장 발달을 통해 왕조 부흥에 이바지한 최대 사업이었다”며 “조선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대동법을 완성한 김육의 공로를 빼놓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책은 김육이 어린 나이에 《소학》을 읽으며 경세제민의 뜻을 품고 이를 사망했을 때까지 지켰던 삶을 따라간다. 13세에 임진왜란을 겪으며 부모를 잃었던 김육은 은거해 10년간 농사를 지어 집안을 일으켰다. 이때 소상히 경험한 농촌 실정이 민생 안정을 위한 구체적 정책 실현으로 이어졌다.

40대 중반에서야 관직에 오른 김육은 중앙 관부부터 지방관, 사신 등 다양한 경험을 쌓은 뒤 70대에 우의정에 올라 대동법 확대 시행을 추진했다. 그는 무엇보다 당파 이해가 아니라 자신의 소신과 철학을 따라 정책을 건의하고 추진했다. 저자는 “그 과정에서 공방을 거치며 대립했던 인사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고, 다른 당색을 가진 관료들과 협력을 이루기도 했다”며 “이런 뚝심 있는 소신과 정파를 초월한 정치력으로 조선 최대의 경제 정책 업적을 이뤄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김육이 투철한 유학자면서도 공리를 추구하며 개방적 자세로 다양한 학문을 포용한 근세 실학자로서의 면모도 갖추고 있었음을 강조한다. 그는 명분과 의리에 매달린 주자학자와 달리 ‘오랑캐’로 간주됐던 청나라의 문물부터 서양 문물에도 개방적이었다. 태음력에 태양력의 원리를 적용해 24절기 시각과 하루 시각을 정밀하게 계산해 만든 역법인 시헌력을 도입했고, 중국의 수차와 수레, 직기 도입도 추진했다.

저자는 “오늘날 퇴계, 율곡, 정약용 같은 대학자들은 높이 받들고 있지만 김육처럼 정책 업적을 가진 조선시대 인물에 대해 그에 상응하는 평가를 하지 못했다”며 “조선 왕조 이해뿐 아니라 대한민국 정치와 정책 발전을 위해서도 김육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