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화학·철강 수요가 격리됐다…꼼짝없이 전염된 '적자 바이러스'

입력 2020-03-09 17:12
수정 2020-03-10 01:09
“정유·화학·철강 모두 제품을 팔면 팔수록 손해가 나는 상황입니다. 이대로 가면 1분기 적자가 불가피합니다. 더 큰 문제는 수요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A정유사 관계자)


한국 제조업의 기둥인 포스코 LG화학 SK이노베이션 에쓰오일 등 중화학공업이 흔들리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중국 수요가 급감하면서 철강과 석유화학 제품 가격이 뚝뚝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요 감소→재고 급증→가격 하락’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상황이다. 1분기 무더기 적자에 이어 인력 구조조정이 뒤따를 것이란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다.

선박·항공유 수요 급감

9일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4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원유(WTI)는 배럴당 10.1%(4.62달러) 하락한 41.28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2016년 8월 이후 최저치다.

원유값이 급락하면서 국내 정유사들은 재고평가손실을 떠안게 됐다. 통상 정유사들은 2~3개월 전 원유를 구입한 뒤 가공·판매하기 때문에 미리 사둔 원유 가치가 떨어지면 그만큼 손해를 본다.

수익과 직결되는 정제마진도 축소되고 있다. 정제마진은 휘발유·경유 등 석유제품 가격에서 원유 가격을 뺀 것이다. 손익분기점은 4~5달러인데 올 들어 3달러를 밑돌고 있다. 코로나19 여파로 선박유와 항공유 수요가 줄면서 지난주에는 1.4달러까지 추락했다. 시장 조사업체 IHS마킷은 올해 1분기 글로벌 석유 수요가 전년 동기와 비교해 일평균 380만 배럴(3.8%) 줄어들 것으로 추정했다. 코로나19 충격파가 본격화할 2분기에는 수요가 더욱 급감할 전망이다.

정유사들의 1분기 실적 추정치는 연일 곤두박질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의 1분기 영업이익 추정치는 3개월 전 4824억원이었지만 현재 106억원까지 낮아졌다. 삼성증권은 4040억원 영업손실을 낼 것으로 내다봤다. 에쓰오일, GS칼텍스도 이대로 가면 1분기 영업 적자가 불가피하다는 분석이다.

화학업계의 정제마진이라고 할 수 있는 에틸렌 스프레드(에틸렌 가격에서 원료인 나프타 가격을 뺀 것)도 악화하고 있다. LG화학, 롯데케미칼 등의 에틸렌 스프레드는 t당 130달러 선으로 손익분기점인 t당 250달러를 한참 밑돌고 있다. 만들수록 손해가 난다는 뜻이다. 롯데케미칼은 지난 5일 충남 서산공장 폭발 사고까지 겹쳐 대규모 손실이 예상된다.

손실을 감당하지 못한 SK이노베이션은 SK에너지의 원유 정제공장 가동률을 15% 낮추기로 했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창사 이래 처음으로 희망퇴직을 검토한 에쓰오일에 이어 구조조정이 정유업계 전체로 번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중국산 철강 재고는 급증

철강업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중국의 철강 재고에 고민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말 중국의 철강 재고는 3345만t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된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고치다. 작년 말보다 세 배 이상 늘어났다. 철강값은 연초보다 5~7% 하락했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 철강사들이 고로 가동률을 최근 63%까지 낮췄지만 자동차 조선 등의 수요가 살아나지 않으면서 재고가 점점 더 쌓이고 있다”고 전했다.

포스코, 현대제철 등 국내 철강업체에도 불똥이 튀고 있다. 철강사들은 작년 실적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지난달부터 자동차 조선업체들을 상대로 철강 가격 인상을 시도하고 있는데 중국산 철강값이 떨어지면서 협상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작년 4분기 29년 만에 분기 적자를 기록한 현대제철은 1분기에도 실적 개선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포스코의 1분기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보다 35.4%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업계 관계자는 “현대제철이 단조사업 분할에 이어 강관사업부 매각 등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최만수 기자 beb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