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눈 뜬 장님'이라던 T렉스, 실제론 현미경 시력이었다

입력 2020-03-05 17:06
수정 2020-03-06 03:18

영화 ‘쥬라기공원’에서 어마어마한 크기의 공룡 티라노사우루스(T렉스)를 보고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려는 사람들에게 고생물학자 앨런 그랜트는 이렇게 말한다. “잠자코 있어요!” 움직이지 않으면 T렉스가 볼 수 없을 거라면서 말이다. 정말 그럴까.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대의 고생물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스티브 브루사테 교수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T렉스는 두 눈으로 보면서 심도를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브루사테 교수는 《완전히 새로운 공룡의 역사》에서 ‘공룡의 왕’으로 불리는 T렉스의 전기(傳記)를 새롭게 썼다. 지금부터 6800만~6600만 년 전에 살았던 T렉스는 거대했다. 성체의 몸 길이는 13m, 체중은 7~8t에 달했다. T렉스는 50여 개의 날카로운 나이프 모양 이빨로 한번 물면 먹잇감의 뼈까지 뚫었다. 이빨 하나의 깨무는 힘이 1360㎏f에 달했다. 덩치가 너무 커서 쾌속 질주는 불가능했지만 매복 사냥에 능했다.


엄청난 크기의 T렉스도 알에서 태어날 땐 비둘기만 했다. 예전에는 T렉스가 평생 성장을 계속해 거구가 됐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 역시 최근 연구에서 틀린 것으로 판명됐다. T렉스는 청소년기인 열 살부터 스무 살까지 매년 760㎏씩 성장했다고 한다. 하루 2.1㎏꼴이다. 매일 약 110㎏의 고기를 먹어치운 대식가였던 이유다.

저자는 이 책에서 공룡의 기원부터 진화, 멸종까지 최신 연구 성과와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곁들여 소개한다. 책의 원제는 ‘The Rise and Fall of Dinosaurs’로 ‘공룡흥망사’쯤 되겠다. 번역서 제목을 ‘완전히 새로운 공룡의 역사’로 한 것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신세대 과학자들의 활발한 화석 연구로 기존의 통념과 학설들이 깨지고 있어서다. 아르헨티나의 사막부터 알래스카의 얼어붙은 불모지까지 전 세계에서 1주일에 한 번꼴로 신종 공룡이 발견되고 연구 방법도 날로 새로워지고 있다고 한다.

지구상에서는 지난 5억 년 동안 다섯 차례의 대멸종이 발생했다. 이 중 약 2억5200만 년 전 고생대 페름기 말기의 대멸종 이후 다리를 쩍 벌린 동물들 중에서 새로운 파충류 그룹이 진화했다. ‘똑바로 서기’ 자세를 개발한 ‘조룡’이었다. 조룡은 네 다리를 몸통 아래로 밀어넣음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 더 빨리 달릴 수 있고, 더 넓은 지역을 관할했으며, 먹이를 더 쉽고 효율적으로 잡을 수 있었다. 에너지도 덜 소비했다. 그 결과 조룡은 화산 폭발의 대혼돈 속에서도 살아남아 다양한 종으로 진화했으며, 2억3000만 년쯤 전에 최초의 공룡이 등장했다. 아르헨티나 이치괄라스토주립공원에서 발굴한 뼈들이 바로 그것이다.

초창기에 덩치도 작고 수도 적은 ‘언더독’ 신세였던 공룡은 5000만 년에 걸친 트라이아스기 동안 줄기차게 진화했다. 여전히 주류는 공룡이 아니라 공룡의 사촌뻘인 원시 공룡형류나 초기 악어들이었지만 2억100만 년 전, 트라이아스기 말기의 화산 폭발과 대멸종은 역설적이게도 공룡에게 대반전의 기회를 제공했다.

지구 역사상 최대 화산 폭발로 생태계가 위축됐는데 공룡은 더욱 다양해지고 커졌다. 공룡들은 판게아(대륙이 분리되지 않았던 초대륙) 해체, 화산활동, 사나운 기후변화, 들불을 모두 견뎌내고 전 세계로 퍼져나가 ‘공룡시대’를 열었다. 저자는 이 시기 공룡들, 특히 목이 긴 용각류의 덩치가 급속도로 커진 이유로 엄청난 양의 먹이 섭취와 소화, 고속 성장, 효율적인 호흡, 가볍고 강한 뼈, 과도한 체열의 방출 등을 꼽았다. 용각류는 이후 1억 년 동안 쥐라기 세상을 지배했다.

1억5000만 년 동안 전개된 공룡의 역사는 6600만 년 전 백악기 말, 직경 10㎞의 소행성이 멕시코 유카탄 반도를 강타하면서 막을 내렸다. T렉스도 트리케라톱스도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공룡은 지금도 살아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는 “공룡을 연구하는 고생물학자들이 발견한 사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만 들라면, 단연코 ‘새는 공룡’이라는 깨달음”이라고 했다. ‘깃털 공룡’이 그 증거다. 새는 육식공룡인 수각류와 깃털, 차골, 세 발가락이 있는 발, 뼈의 수많은 특징 등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공룡의 갑작스러운 멸종에서 뼈아픈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공룡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인류가 자신의 행동으로 주변 환경이 급속히 바뀌는데도 자연계에서의 위치가 확고할 거라고 믿고 있다며 이렇게 묻는다. “이런 일이 공룡에게도 일어났다면, 우리에게도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지 않을까?”

책에는 수많은 공룡과 이를 연구한 학자들, 공룡 화석이 나온 지역 이름이 등장한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다. 하지만 복잡한 내용을 일목요연하고 흥미롭게 설명한 저자의 탁월한 능력과 글솜씨가 이를 극복하게 해준다.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