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하신 상품은 신청이 안 됩니다.”
2일 서울 광화문 A은행 지점. 지난달 정부가 발표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관련 ‘긴급 경영안정자금 대출’을 받을 수 있는지 문의하자 “불가능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은행 직원은 “오전에 서울신용보증재단에서 ‘한도가 소진됐다’는 통보를 받았다”며 “재단에 가서 문의해 보라”고 했다. 다른 방법은 없겠냐고 하자 부동산담보대출과 신용대출을 권했다.
정부가 ‘코로나19 금융지원 대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막상 자영업자들이 돈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정부는 지난달 7일 2조원 규모의 지원 대책을 발표했고, 28일에는 규모를 11조원으로 늘렸다. 정책금융기관과 민간은행을 총동원해 신규 자금을 차질 없이 수혈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이날 소상공인진흥공단과 신용보증재단 등에서 어렵사리 상담을 마친 자영업자들은 “심사에만 최소 3~5주 걸릴 것이라는 안내를 받았다”고 푸념했다. 은행은 보증을 받아와야 대출을 내줄 수 있는데, 보증기관 상담 단계부터 지체되고 있는 것이다. 서울신용보증재단은 밀려드는 전화를 감당할 수 없자 상담과 서류 접수 업무를 은행 지점 200여 곳에 위임하기도 했다.
정책대출 공급이 늦어져 생기는 1~2개월의 공백기에는 고금리 사채로 버틸 수밖에 없다는 하소연이 나온다. 신용등급 7등급 이상이 아니면 아예 보증을 받을 수도 없다.
소상공인들은 “정부 발표를 믿고 찾아갔지만 정작 현장에선 구할 수 없는 마스크와 마찬가지인 상황”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2년 전 창업한 식당이 사실상 개점휴업 중이라는 B씨는 “대출이 언제 실행될지 누구도 확답을 주지 않는다”고 답답해했다.<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margin:25px 0; border:1px solid #c3c3c3" />"하루가 급한데 두 달 걸린다니"…금융지원도 자영업자 '희망고문'
“‘긴급자금’을 지원해준다며 두 달이 걸리는 게 말이 됩니까.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데….”
4년 전 서울에서 부인과 함께 학원을 차린 K씨.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퍼진 지난달부터 직원 5명은 모두 집에서 쉬고, 임차료만 꼬박꼬박 내고 있다. K씨는 지난달 8일 정부가 ‘코로나19 금융지원 대책’을 내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보증기관을 찾아갔다. 예약이 밀려 24일에야 상담을 받을 수 있었다. 서류 작업을 마치고 은행을 찾았지만 이번엔 “접수가 밀려 3월 말 이후에나 처리될 것 같다”는 답을 들었다. K씨가 신청한 대출한도 2000만원은 그대로 통과됐지만 이 돈이 언제 통장에 들어올지는 기약이 없다. K씨는 “휴원령이 길어지면서 이달 매출은 ‘0원’이 될 것”이라며 “신용대출도 이미 다 끌어 썼는데 막막하다”고 하소연했다.
말뿐인 ‘신속 금융지원’
정부의 ‘방역 실패’로 인한 코로나19 확산은 자영업자들의 ‘돈맥경화’를 심화하고 있다. 지난달 접수된 코로나19 관련 금융지원 상담 5만22건을 분석해 보면 음식점업(1만7413건), 소매업(9113건), 도매업(4161건) 등 영세 자영업자가 속한 업종이 많았다.
중소벤처기업부와 금융위원회 주도로 발표한 11조원 규모의 ‘코로나19 금융지원 대책’에는 자영업자를 위한 여러 대출상품이 망라돼 있다. 소상공인진흥공단이 1조4000억원, 지역 신용보증재단이 1조원, 기업은행이 2조5000억원, 12개 은행이 3조2000억원 등을 최저 연 1%대 금리로 빌려준다는 것이다. 정부는 “매출이 감소한 자영업자에게 지체 없이 자금을 공급하고 필요하면 규모를 더 키우겠다”고 했다.
하지만 ‘골목 사장님’들이 체감하는 지원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2일 서울 시내 한 은행은 코로나19 관련 금융상담을 아예 받지 않았다. “담당자가 휴가 중”이라며 “전화번호를 남기고 가면 내일 연락하겠다”고 했다. 이날 한 보증기관에서 상담을 마치고 나온 자영업자 P씨는 “상담 신청이 밀려 있고 업주들은 다 절박한데, 창구 직원은 평소처럼 느긋한 분위기”라고 했다.
은행원들 “면책 약속 믿을 수 있나”
금융권 관계자들은 업무 폭주에 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규모 지원대책을 덜컥 발표한 점이 문제라고 꼬집었다. A은행 관계자는 “보증서가 나와야 대출할 수 있는데, 소상공인들이 지금 보증을 신청해도 4월 넘어 보증서를 발급받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보증기관은 직접 신청받은 것을 우선 처리하기 때문에 은행에서 신청한 사람들은 손해를 보는 상황이라는 설명이다. 은행 관계자들은 “소상공인진흥공단, 지역보증재단, 은행 등으로 분산된 창구를 통일하거나 인력을 보강하는 등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금융위는 은행에 “코로나19 관련 대출에는 신용도 등을 너무 깐깐하게 심사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일선 직원들은 당국 지침을 따랐다가 뒷감당에 진땀을 흘렸던 ‘학습효과’ 탓에 불안해하는 눈치다. “금융당국이 끝까지 일관된 기조를 유지한 적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B은행 관계자는 “일부 영업점에서 ‘나중에 부실이 나도 정말 문제가 없을까’라는 고민이 확실히 있다”며 “위에서는 적극적인 면책을 약속하지만 기조가 바뀌어 부실 책임을 담당자에게 물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다”고 했다. 정부는 ‘최대 대출한도’를 중심으로 정책을 홍보하는데, 기업별 대출한도가 그에 못 미치면 민원이 은행에만 쏟아진다는 점도 부담이다.
신용등급 7등급 넘어야 지원
은행과 보증기관들은 기존 대출이 있어도 추가 한도를 부여하는 등 자영업자를 최대한 지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자영업자를 감싸안을 순 없다. 신용등급 7등급 이상인 사람만 코로나19 정책 대출을 이용할 수 있다.
경기도에서 봉제공장을 운영하는 S씨는 이날 한 은행을 찾았다가 코로나19 긴급 대출을 포기했다. “신용등급 7등급 이상이 아니면 보증이 나오지 않는다”는 답을 들었기 때문이다. S씨는 “사업 실패로 신용등급이 떨어졌다”며 “이런 비상상황에서도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고 했다. 그는 이어 “매일 남대문시장을 돌며 수금에 나서고 있지만, 돈을 한 푼도 거둬들이지 못하고 헛걸음하는 날이 부지기수”라고 푸념했다.
임현우/정지은/송영찬 기자 tard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