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때문에 납품일 못 지키면 면책될까"... 기업들 '불가항력' 문의 급증

입력 2020-03-01 19:52
수정 2020-03-01 19:54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중국 등과의 무역거래, 기업간 인수·합병(M&A), 근로자 수당 지급 등에 문제가 발생하면서 계약 불이행의 면책사유가 되는 ‘불가항력(force majeure)’에 대해 기업들의 관심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대형 법률회사(로펌)들은 중국 관련 팀을 중심으로 국제무역 중재 노동 해상 보험 건설팀 등과 협업해 기업들의 자문 수요에 대비하고 있다.

◆피해 기업들 로펌에 문의 쇄도

1일 법조계에 따르면 최근 로펌엔 중국 업체의 납기지연으로 손해를 입은 국내 기업들의 문의가 빗발치고 있다. 로펌들은 코로나19에 따른 기업 관련 주요 법률 이슈로 △중국과 무역 거래 피해에 따른 국제 분쟁 △선박 체선료(정박료) 분쟁 △항공 해운 여행 등 코로나 민감업종 인수·합병(M&A)에서 가격 조정 리스크 △코로나19 의심 근로자 수당 지급 문제 등을 꼽는다.

중국 내 코로나19 확진자 급증으로 현지 공장이 가동을 멈추면서 이를 재가공해 미국 등에 수출해야하는 국내 기업들의 피해가 상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 중심의 부품 공급망을 갖춘 기업일수록 피해가 큰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손해배상 여부나 계약 변경 가능성을 묻는 질문이 로펌에 급증하는 추세다.

한 대형로펌 변호사는 “국내 업체에 부품을 공급하는 중국조선소들이 거의 다 일시적으로 문을 닫게 되면서 국내 조선사들도 선박 건조 지연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며 “향후 선주와의 계약 불이행 리스크에 따른 법률 자문을 구하는 사례가 많았다”고 말했다.

중국과 거래가 많은 기업 뿐만 아니라 항공 해운 등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은 업종의 경우 회사 존립을 걱정해야할 정도로 손해가 큰 상황이다. 항공사의 경우 중국 관련 노선 운항이 잇따라 중단되고 아시아 항로(인트라 아시아)를 운항하는 국내 해운사들도 물동량 급감해 이 회사들을 자문하는 로펌들도 비상이 걸린 상황이다. 한 해상 전문 변호사는 “코로나19 확진자가 많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수출입 선박에 대해 각국의 검역 절차가 강화됐다”며 “해외 항구에서 컨테이너 화물 운송작업이 지체돼 화주 입장에서 체선료(정박료) 부담도 커질 것으로 전망한다”고 말했다.

한 중소로펌엔 코로나19 예방용품인 마스크 관련 법적 문의가 쇄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로펌 관계자는 “전세계적으로 마스크 공급보다 수요가 폭증하면서 한국 마스크 제조업체를 상대로 중국 구매업체들이 ‘왜 납기를 제때 못맞추냐’며 법적 분쟁이 벌어질 조짐”이라며 “제조업체가 이미 민간업체와 계약했는 데 정부기관에서 갑자기 이를 사겠다고 나서 계약파기가 가능한지를 묻는 사례도 많다”고 전했다.

◆중국외 국가선 ‘인정 판례’적어

앞으로 기업들은 ‘코로나19로 인한 직·간접적인 손실이 누구 책임이냐’를 두고 국제 소송이나 중재 등을 통해 법적 다툼을 벌일 가능성이 크다. 일반적으로 기업간 무역 거래 계약서에는 태풍 홍수 지진이나 전쟁 등 ‘피할 수가 없고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황’을 불가항력으로 규정하면서 손해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도록 한다. 불가항력에 대해 민법은 ‘천재 기타 사변으로 인해’라고 표현했고, 대법원은 2007년 선고에서 “위험 발생의 예견 가능성이나 그 결과 발생의 회피 가능성을 기대할 수 없는 경우”라고 설명했다.

중국 법원에선 코로나19를 불가항력으로 보고 적극적인 면책 판결을 내릴 가능성이 높다. 앞서 중국 법원은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에 대해서도 불가항력으로 인정한 판례가 있다. 중국은 자국내 기업을 보호하기위해 코로나 피해 업체에 대해 계약불이행에 따른 책임이 없음을 입증하는 ‘불가항력증명서’를 발급해주고 있다. 법무법인 태평양 상해사무소의 김성욱 변호사는 “중국 우한시의 교통 통제, 구정연휴 연장으로 인한 정부 부서 휴무, 공장 조업중단 명령, 관련 업계의 특별 조치 등과 관련해 정부 또는 관련기관의 명령 행정조치들로 인해 계약상 채무의 이행을 할 수 없게 되는 경우 불가항력 사유에 해당할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증명서는 중국내에서만 효력이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 재판부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 로펌 국제통상 변호사들의 공통된 견해다.

중국 이외의 나라에서 어떤 판결이 나올 지 여부에 대해선 법조계 전망이 엇갈린다. 통상 기업간 거래 분쟁시 ‘갑’의 위치에 있는 기업이 속한 나라의 준거법에 의해 소송이나 중재가 이뤄진다. 법무법인 세종의 한 변호사는 “건설 보험 해상분쟁의 준거법인 영국법 판례를 보면 불가항력에 대해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며 “중국 이외 국가의 국제 소송에서 전염병이나 질병의 확산을 불가항력으로 인정한 전례가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또한 “만약 중국 측 조달 문제로 피해를 본 국내 기업이 다른 나라에서 소송을 제기할 경우 재판부는 중국 말고 다른 나라에서 납품 대체를 시도했는 지부터 면밀히 따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만 “정부의 조치나 명령이 있었다면 불가항력으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아시아나 등 민감업종 M&A흔드나

반면 세계보건기구(WHO)가 비상사태를 선포할 정도로 전세계적으로 피해가 큰 상황임을 감안할 때 불가항력으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도 나온다. 대한상사중재원 관계자도 “요즘 무역업체들의 질의가 많아지고 있는 데 과거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와 마찬가지로 불가항력으로 판단될 가능성이 높다고 안내하고 있다”고 말했다.

법무법인 광장의 한 변호사는 “기업간 계약서 상 불가항력 관련 조항에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 확산’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았더라도 인정받을 확률이 높다”며 “영국 판례도 꼭 불가항력이 아니더라도 이에 준하는 ‘사정변경’ 등을 통한 계약 변경을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불가항력에 대해 일률적인 흐름을 보인다기보다 각국 재판부가 자국내 기업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판결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대출 등 금융권과 차입거래에 대해선 예외없이 불가항력 인정이 불가능하다는 게 로펌 변호사들의 설명이다.

코로나19는 항공 해운 여행 등 코로나 민감업종 M&A 시장도 뒤흔들 전망이다. 한 대형로펌 기업자문 변호사는 “통상 M&A 계약서엔 거래의 선결 조건으로 “중대한 부정적 영향이 없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는 데 코로나19가 ‘중대한 부정적 영향’에 해당할 가능성이 있다”며 “아시아나항공 M&A계약에도 이 조항이 있어 문제가 될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로펌들의 노동팀도 바빠지고 있다. 일부 건설현장에서 코로나 사태로 공사 중단이 속출하면서 건설회사 하청업체와의 계약관계, 근로자 처우에 대한 문의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코로나 확진자와 의심자의 수당에 대한 문의도 많은 것으로 전해졌다. 김동욱 세종 노동팀 변호사는 “단순 코로나 의심자의 경우 회사가 강제로 연차휴가를 쓰게 할 순 없고 독려할 순 있다”며 “강제로 휴가를 쓰게 할 경우 휴업수당을 줘야하는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확진자의 경우 감염병예방법에 따라 국가로부터 비용 지원을 받고 유급이나 무급 휴가를 쓰게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안대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