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日 폐색감, 대만 망국감…한국은?

입력 2020-02-27 18:30
수정 2020-02-28 00:30
“모든 것은 상호 연관돼 있다”는 것은 불교, 도교와 헤겔, 마르크스 등의 일관된 교훈이다. 외계인 출현이 아닌 이상 세상만사는 나비효과든, 인과관계든 서로 얽혀 있다고 보는 게 맞을 듯싶다. 하다못해 ‘발가락이 닮았다’고 하지 않나. 상황은 계속 바뀌지만 변치 않는 게 인간 본성인 때문일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지난 1년간 동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서로 무관한 독립 사건일까. 뭔가 끓어넘칠 만한 변화가 이 지경을 만든 건 아닐까 싶다.

그 출발은 작년 3월 말 범죄인 인도법(송환법) 반대로 촉발된 홍콩 시위 사태였다. 6월 이후에는 ‘100만 집회’로 커지면서 민주화 운동으로 확산됐다. 홍콩 사태는 올 1월 초 대만의 선거판도까지 뒤집어 놨다. 대만 반중파는 중국공산당의 “소련의 오늘이 우리의 내일”이란 옛 구호를 패러디해 “오늘의 홍콩이 내일의 대만”이란 슬로건을 내걸었다. 선거 과정에서 대만인들이 크게 공감한 게 ‘망국감(亡國感)’이다. ‘이러다 나라 망할 것 같다’는 느낌이 유권자들을 투표장으로 이끌었다.

대만인들이 느낀 집단 불안감은 기시감이 있다. 일본인들이 ‘잃어버린 20년’을 겪으며 자주 언급한 게 ‘폐색감(閉塞感)’이다. 미래 비전이 안 보이고, 뭘 해도 안 되고, 사방이 온통 꽉 막힌 듯한 기분을 의학용어인 폐색증에 비유한 것이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는 집단 불안감을 극한으로 몰고갔다. 그런 기류를 간파한 덕에 아베 총리는 전후 최장기 집권을 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대유행은 동아시아에 또 다른 집단 불안감을 안겼다. 홍콩 사태, 대만 선거, 코로나 사태까지 일련의 사건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중국이라는 ‘기저질환’이요, ‘덩치 커진 중2’ 같은 마구잡이식 행태의 반작용이다. ‘도대체 중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아시아 도처에서 묻고 있다.

코로나 대처 실패로 위기에 처한 문재인 정부도 그 연원의 8할쯤은 중국과의 잘못된 관계 설정에서 비롯됐다. 중국인 입국 차단 논란, 마스크 품귀, 정부·여당의 실언과 궤변 등이 다 엮여 있다. “중국의 어려움이 우리의 어려움”이라고 한 대가가 중국에서의 한국인 격리, 현관의 빨간딱지, 적반하장 조롱이었다. 중국은 “외교보다 중요한 게 방역”이라고 한 수 지도해줬다.

우왕좌왕했어도 정직하고 겸손했다면 국민 반감은 다소 누그러졌을 수도 있다. 모두에게 예외 없이 재앙인 전염병을 합심해 이겨내자는 데 누가 반대하겠나. 하지만 무능이 위선·책임전가와 결합할 때 전혀 다른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그 화합물은 꾹꾹 참아온 민초들의 인내심을 바닥내고 정부를 문제 그 자체로 인식하게 만든다.

‘정부가 문제’라고 여기는 순간, 지난 3년간 기억들이 식도를 역류하듯 되올라오게 마련이다. 셀 수도 없는 정책 실패, 중력법칙 같은 시장원리를 거스른 ‘부동산 정치’, 내로남불 끝판왕에게 ‘마음의 빚’ 운운한 초현실성, 그러고도 ‘사회적 패권을 교체하겠다’는 오만…. 그 결과가 어제 100만 명을 돌파한 ‘대통령 탄핵’ 청원일 것이다.

그래도 달라질 것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코로나19가 이 정부의 실력을 들춰낸 것은 맞지만, 보수야당이 집권하면 잘할 것이라는 확인증을 써준 것도 아니다. 그 사촌 격인 메르스가 이미 보여주지 않았나.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그놈이 그놈일 뿐’이고 ‘선조냐 고종이냐’ 차이 정도다. 진짜 국민의 비극은 “이게 나라냐”가 한없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수많은 국민이 국격(國格)이 녹아내리고 나라가 무너질 것 같다고 토로한다. 경제와 문화 국격은 높아졌는데 가장 기본적인 국민안전과 보건안보의 국격은 최빈국보다 별로 나을 게 없다. 일본이 폐색감, 대만이 망국감을 느꼈다면 지금 한국인들은 어떤 느낌일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외신은 우리 경제에 대해 ‘침몰감(sinking feeling)’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지금 그걸로 충분할까.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