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2005년 짧은 러시아 여정에서 만난 바이칼 호수의 붉은 양귀비 꽃잎을 책갈피 속에 간직했다. 6년 후 재직 중이던 회사에서 추진한 천연자원 개발 프로젝트는 러시아로 가는 새로운 다리가 됐다. 4년을 머물며 동경하던 그곳에서의 소회를 산문집 《시베리아를 건너는 밤》에 담았다.
1993년 ‘시문학’으로 등단한 저자는 《손끝으로 달을 만지다》 《첫눈은 혁명처럼》 등의 시집을 냈다. 대학에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한 뒤 막연하게 광활한 대지를 향한 꿈을 꿔왔다. 하지만 그렇게 그리던 러시아 생활을 시작했을 때 막상 마주한 것은 백야와 겨울의 혹독한 어둠과 추위, 눈이었다. 우랄산맥, 바이칼호 등 이질적인 자연은 날이 선 시인의 감수성을 자극했다.
기행문 성격을 띠고 있지만 러시아의 문화 예술, 문명의 감수성에 대한 섬세한 통찰이 돋보인다. 책은 시인의 시선으로 혁명가 레닌과 크룹스카야, 이네사의 행적과 제정 러시아 시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오간 수많은 예술가의 자취를 따라간다. 혹독한 겨울밤엔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생가에 갔던 기억을 되새기며 《닥터 지바고》의 인물들과 그에 얽힌 러시아의 역사를 돌아본다. 그는 지바고와 라라의 사랑에 대해 “전쟁과 혁명이 있었기에 그들의 사랑은 빛났고 이별은 참혹했다”며 “고난은 사랑을 더 비극적으로 만들었고 비극적인 사랑은 불멸의 사랑을 완성했다”고 서술한다.
한편에선 톨스토이의 작품과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이 흐른다. 저자는 사랑을 위해 정적과 결투를 벌이다 죽은 작가 푸시킨의 삶과 자살을 통해 사랑의 진정성을 증명한 시인 마야코프스키의 생에 대해서도 사색한다.
저자가 찍은 러시아 구석구석의 풍경 사진과 그곳을 마주한 후 지은 시들이 책 읽는 재미를 더한다. 러시아를 향한 환상과 호기심에 시인은 답한다. “러시아는 장편의 나라다. 긴 겨울과 대륙의 빈 공간을 시로 채우기에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러시아의 많은 시인이 절명한 이유는 광활한 시간과 공간을 시로 다 채울 수 없어 좌절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러시아에서 이긴다는 의미는 견딘다는 것이며,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송종찬 지음, 삼인, 308쪽, 1만5300원)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