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나항공을 품에 안은 정몽규 HDC그룹 회장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아시아나항공이 지난해 8000억원이 넘는 순손실을 낸 데다 올해도 항공 업황이 바닥을 기고 있어서다. 미·중 무역 전쟁과 한·일 갈등에 따른 노(NO) 재팬 운동, 환율 상승(원화가치 하락) 등 악재가 겹친 와중에 예기치 못한 복병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까지 만났다. “비행기를 띄울 곳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아시아나항공은 사면초가 신세가 됐다.
과감한 베팅을 통해 ‘모빌리티’(이동수단)를 그룹의 새 미래 성장동력으로 삼겠다는 정 회장의 꿈이 큰 도전에 직면했다는 분석이다. HDC는 현대그룹으로부터의 계열분리 20주년을 맞은 지난해 11월 재무적 투자자인 미래에셋금융그룹과 손잡고 2조5000억원을 들여 아시아나항공 인수 우선협상자가 됐다. 지난해 12월 금호산업(아시아나항공 대주주)과 주식매매계약(SPA)을 체결한 뒤 인수 막바지 작업을 진행 중이다.
아시아나항공 작년 ‘어닝 쇼크’
26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정 회장은 이달 들어 아시아나항공을 비롯해 아시아나개발, 아시아나IDT, 에어서울, 에어부산, 금호리조트 등 14개 계열사 대표와 임원을 차례로 면담 중이었다. 업무 파악과 인수 후 사업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면담은 지난주 갑자기 중단됐다. 코로나19 확산 여파로 항공업계 사정이 급격히 악화했기 때문이다. HDC그룹 관계자는 “아시아나항공 인수와는 관련이 없는 다른 업무 일정이 생겨 일시적으로 중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시아나항공 안팎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HDC의 인수 작업에 이상 신호가 생긴 게 아니냐는 것이다. 증권업계 일각에서는 HDC가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포기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HDC와 금호산업이 주식매매계약을 마치고 난 뒤 항공업계 상황이 180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아시아나항공은 지난해 순손실 8378억원(연결 기준)을 내며 적자 전환했다고 지난 12일 발표했다. 최근엔 코로나19 탓에 중국 등 해외 노선은 물론 제주 하늘길까지 막혀 실적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여기에 미국과 유럽 각국이 한국에 대해 여행 경보령을 내리면서 최대 매출처인 미주, 유럽 노선도 위태로워졌다.
과감한 베팅에도 시장 반응은 냉랭
정 회장은 아시아나항공 인수전 참여 당시 과감한 투자를 결정했다. 그의 투자에는 친분이 있는 인도의 투자 대가 모니시 파브라이 파브라이인베스트먼트 회장이 영향을 미쳤다는 후문이다. 파브라이 회장은 《투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책을 통해 과감한 투자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정 회장은 이 책의 추천글을 썼다. 파브라이 회장은 자신의 책에서 ‘단순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업과 잘 알려진 기존 업종이 침체됐을 때 큰 규모로 과감하게 투자해야 한다’고 했다.
정 회장의 판단으로는 아시아나항공이 여기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HDC가 아시아나항공 인수전에서 경쟁사였던 애경그룹보다 1조원가량 더 써낸 이유다. 아시아나항공의 총자산은 10조원가량으로 HDC그룹과 덩치가 비슷하다.
정 회장은 아시아나항공 인수 직후 계열사 임원들에게 두 권의 책을 추천한 것으로 알려졌다. 레이 달리오의 《원칙》과 에이미 에드먼슨의 《두려움 없는 조직》이다. 두 권 모두 리더의 역할과 조직 혁신, 성장에 관한 내용을 담은 책으로 과감한 베팅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HDC의 베팅을 보는 시장의 반응은 냉랭했다. HDC가 아시아나항공 인수 예비입찰 참여를 선언하기 전날(9월 2일) 3만6050원이던 HDC현대산업개발 주가는 이날(26일) 1만8450원으로 주저앉았다. 한국기업평가는 HDC현대산업개발을 ‘부정적 검토 대상’ 명단에 올렸다. 인수자금 조달 우려와 ‘승자의 저주’ 등을 반영했다는 설명이다.
덩치 커졌지만 과제도 많아
아시아나항공 인수로 HDC의 덩치는 급격히 커졌다. 재계 순위(자산 기준)가 지난해 33위에서 올해는 15위권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한항공을 계열사로 둔 한진그룹은 지난해 기준 13위다.
몸집은 키웠지만 해결해야 할 과제가 쌓여 있다. 대규모 자금 투자 여파로 악화할 재무구조를 개선하는 게 첫 번째 숙제다. 업계에서는 범현대가(家)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게 급선무라는 의견을 내놓는다.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 현대백화점그룹 등의 자금과 네트워크를 활용하면 항공업계의 실적 악화 파도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재무 파트너인 박현주 미래에셋금융그룹 회장과의 관계 재정립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시장에선 범현대가의 역할이 커질수록 미래에셋금융그룹의 역할이 모호해질 것이란 분석을 내놓고 있다.
업계에서는 각종 악재에도 HDC가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접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인수를 포기하면 계약금(인수금액의 10%) 2500억원가량을 날리게 된다. HDC 관계자는 “상황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인수계약 파기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못 박았다. 다만 에어부산 등 일부 아시아나항공 계열사를 매각할 가능성은 큰 것으로 업계는 예상하고 있다. 아시아나항공은 에어부산 지분을 44.2% 보유하고 있다.
김재후/구민기 기자 h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