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기업들 "현금 쌓자"…회사채 발행 사상 최대

입력 2020-02-25 17:39
수정 2020-05-25 00:03

기업들이 공격적으로 현금을 끌어모으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경영 환경 불확실성이 커지자 선제적으로 ‘곳간’을 채우고 있다는 분석이다.

25일 한국경제신문 자본시장 전문매체 마켓인사이트에 따르면 호텔롯데 LG화학 SK하이닉스 등 이달 조달 규모를 확정한 30개 기업의 회사채 발행금액은 8조9970억원으로 집계됐다. 2012년 4월 회사채 수요예측(사전 청약) 제도가 도입된 뒤 월별 기준으로는 사상 최대 기록이다.

단기자금 조달도 급증하는 추세다. 기업들의 1년 미만 단기자금 조달 수단인 전자단기사채 잔액은 지난 21일 기준 25조9517억원으로 조사됐다. 지난해 초보다 57.9% 불어났다.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자산을 내다파는 기업도 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 들어 이날까지 LG하우시스 등 12개 기업이 2681억원어치의 유형자산 처분 및 양도를 공시했다. 전년 동기(다섯 곳, 738억원)보다 세 배 이상 많은 규모다.

코로나19 여파가 경제현장을 강타하면서 해외 투자기관들은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이 0%대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기업들의 현금 흐름이 예상보다 크게 나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margin:25px 0; border:1px solid #c3c3c3" />"코로나 한파 버티자"
SK하이닉스 1兆·LG화학 9천억 회사채 발행

SK하이닉스는 지난 14일 1조600억원어치 회사채를 발행했다. 민간 기업의 회사채 발행 사상 최대 규모다. 당초 5000억원을 조달할 계획이었지만 2조700억원 규모의 투자 수요가 몰리자 발행금액을 두 배 이상으로 늘렸다. 이번에 마련한 자금은 올해 차례로 만기가 도래하는 차입금을 갚는 데 쓸 계획이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금리 환율 등 금융시장 변동성이 더 커지기 전에 올해 차입금 상환 재원을 한 번에 조달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쏟아지는 유동성 확보 행렬

SK하이닉스 외에도 건설, 유통, 정유, 화학 등 전 업종에 걸쳐 기업들의 유동성 확보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이달 조달 규모를 확정한 30개 기업의 회사채 발행금액은 총 8조9970억원에 달한다. 호텔롯데(4000억원), 현대건설(3000억원) 등 몇몇 기업은 조달금액을 당초 계획보다 두 배 이상 늘렸다.

기업들의 자산 매각도 줄을 잇고 있다. 건자재업체 LG하우시스는 울산 사택을 팔아 630억원을 조달하기로 했다. 코오롱머티리얼은 오는 28일 원사 제조 관련 설비를 태동개발에 넘겨 130억원을 확보할 예정이다. 화장품 제조 업체 스킨앤스킨도 4월 유휴 부동산을 매각해 135억원을 조달할 예정이다. 올 들어 이들을 포함한 12개 상장사가 매각 공시한 유형자산은 총 2681억원어치에 달한다.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란 평가다.

경영환경이 악화돼 현금흐름이 나빠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선제적 자금 조달에 불을 붙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중 무역분쟁, 한·일 무역마찰 등 글로벌 경제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커진 가운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실물 경제에 충격을 몰고 오면서 경기침체 우려가 한층 커졌기 때문이다. 최근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1.6%), 노무라증권(1.8%), 무디스(1.9%) 등 해외 기관은 연이어 한국 성장률 전망치를 1%대로 낮췄다. 노무라증권은 “코로나19로 중국이 봉쇄 조치를 6월 말까지 이어간다면 한국의 성장률이 0.5%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기업 실적 전망도 부정적으로 바뀌고 있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국내 139개 기업의 1분기 합산 영업이익 전망치(증권사 세 곳 이상 추정치 평균)는 20조576억원으로 한 달 전 전망치(22조427억원)보다 9.0% 감소했다. 숀 로치 S&P 아·태지역 수석연구원은 “코로나19에 따른 인구 이동 감소와 (제품 및 서비스) 공급 차질로 한국의 성장률 하락이 불가피해졌다”며 “공급망에 타격을 받은 제조업체와 중국에 중간재를 수출하는 기업들이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자금조달 환경 어려워질 것”

기업들의 신용등급마저 줄줄이 하락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무디스는 지난달 LG화학의 신용등급(Baa1)을 한 단계 떨어뜨린 데 이어 지난 21일엔 이마트를 투기등급인 ‘Ba1’으로 강등시켰다. 동종업체인 롯데쇼핑(Baa3)에도 ‘부정적’ 전망을 붙였다. S&P도 이달 들어 KCC(BB+)를 투기등급으로 낮추고, 이마트 현대제철 SK이노베이션 SK종합화학의 신용도에 부정적 전망을 달았다.

글로벌 신용평가사보다 평가 대상 기업이 훨씬 많은 국내 신평사 역시 기업 등급을 잇달아 하향 조정하고 있다. 나이스신용평가 한국기업평가 한국신용평가 등 국내 3대 신평사가 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기업은 22곳에 이른다.

기업들의 주요 자금 조달처인 채권시장에선 벌써부터 여파가 감지되고 있다. 기관투자가들의 운용 자금이 가장 풍부한 연초임에도 신용도가 우량한 기업이 아니면 투자수요 확보를 장담하기 어려운 분위기다. 지난해 매수 경쟁이 치열했던 A급(신용등급 A-~A+) 회사채마저 투자위험 대비 수익률이 낮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부동산신탁업체인 한국토지신탁(신용등급 A)은 이달 초 2000억원어치 회사채 발행을 위한 수요예측에서 1650억원의 매수주문을 받는 데 그쳤다. 신용도가 비슷한 한화건설(1.48 대 1)과 효성화학(1.68 대 1)도 청약 경쟁률이 2 대 1을 밑도는 저조한 흥행 성적을 거뒀다.

한 증권사 기업금융담당 임원은 “업종 간판 기업마저 신용위험이 커지는 상황임을 고려하면 지금 같은 자금 조달환경이 유지될 것이라고 낙관하기 어렵다”고 했다.

김진성/이태호 기자 jskim102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