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사외이사제도에 변화가 생겼다. 사외이사제는 외환위기를 계기로 기업경영의 투명성 제고와 투자자 보호, 기업지배구조의 개선을 목적으로 1998년 증권거래소의 유가증권상장규정 개정으로 도입됐다. 2001년에는 증권거래법으로 의무화했다. 독립적인 위치에서 지배주주를 비롯한 경영진의 감시·감독을 통해 경영을 투명하게 하고, 정책결정에 조언과 전문지식을 제공해 기업을 돕자는 취지다.
그러나 사외이사에게 관련 정보가 제공되더라도 현안 해결을 위해 노력할 유인이 작거나, 복잡한 경영현안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할 때가 적지 않다. 심지어 기업의 통상적인 비즈니스 상식마저 부족하다 보니 공식적인 회의를 벗어나면 기업경영에 대해 논의하지 않는 것이 관행처럼 됐다. 일반 주주들 역시 단기수익에 더 관심을 두는 현실도 사외이사의 대리인 역할에 대한 실효성을 놓고 종종 의문이 제기되곤 한다.
그런데 이 제도가 궤도를 더 벗어나고 있다. 경영계의 우려는 지난달 21일 정부의 상법과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으로 현실화됐다. 문제의 핵심은 사외이사의 임기 제한과 이사 선임에 대한 정관 변경 두 가지다. 첫째, 법무부는 사외이사 임기를 최대 6년으로 제한했다. 유능한 전문가라도 사외이사의 임기를 제한함으로써 회사와 주주의 인사권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장치가 만들어졌다. 사외이사 선임 과정에서 현실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외부의 정치적·사회적 영향을 감안할 때, 사외이사의 임기 제한은 경영에 대한 외부 개입의 여지를 늘린 셈이다. 외국의 입법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과잉 규제다.
이번 시행령 개정은 상위법의 위임한계도 벗어났다. 상법에서는 사외이사의 결격사유를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하기 곤란하거나 경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로 규정하고 있다. 사외이사의 역량을 결격사유로 정하고 있음에도 시행령으로 최대 임기를 못 박은 것은 상법과 충돌된다. 상장사협의회에 따르면, 당장 3월 주총에서 대기업은 76명의 사외이사를 새로 뽑아야 하고, 3월부터 566개 상장사들은 718명의 사외이사를 교체해야 한다. 직무수행계획서도 함께 제출받아 공개해야 한다. 사적 정보까지 제공하겠다는 취지지만 획일적 규제를 강요하는 행정우월주의다. 출석 의결권의 과반수에, 발행주식 총수의 4분의 1 이상 찬성의 결의로 임원을 선임하는 우리나라만의 엄격한 기준도 지금 상장사들이 혼란을 겪는 이유다.
둘째, 금융위원회는 경영개입 목적의 주주제안을 하려면 ‘5%룰’에 따라 지분변동 시 5일 이내 상세보고토록 하는 공시의무를 바꾸면서, 경영권의 핵심인 이사 선임·해임과 정관 변경의 추진을 경영개입의 범주에서 제외시켰다. 보고의무에 대해 일반투자자는 10일 약식보고로 대체하고, 국민연금을 비롯한 공적연기금에 대해서는 월별 약식보고로 대폭 완화했다. 상장사의 경영권 방어능력을 약화시킨 것이다.
외국과 달리 지배주주의 경영권 방어수단이 전무한 국내 시장에서 주요 상장사의 지분을 대량 보유할 자금력을 갖춘 투자자는 국민연금뿐이다. 국민연금은 앞으로 지분변동에 대한 외부공개 없이도 투자한 상장사의 지배구조를 손쉽게 바꿀 수 있게 됐다. 스튜어드십 코드를 명분으로 투자기업의 경영진과 정관을 바꿀 수도 있어 기업지배와 경영참여가 가능해졌다. 정부와 노동계, 시민단체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국민연금이 기업경영에 참여하는 것은 노후생활 보장이라는 본연의 역할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이번 개정은 안팎으로 경제가 어려운 현실에서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고민해야 할 정부의 역할과는 거꾸로 간 것이다. “엄중한 경제 현실을 감안해 국가적으로 시급하지도 않은 시행령 개정을 보류해 달라”는 경영계의 호소는 묵살됐다. 투자한 기업의 경영참여에 대해 국민의 동의를 묻는 절차도 생략됐고, 정부보다 기업이 더 잘 알아서 하는 시장경제의 작동원리도 잊은 결과다.